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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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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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34회 작성일 21-02-2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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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봉집(高峰集)

저자 : 기대승(奇大升)
역자 : 성백효·이성우·장순범·임정기·송기채·정태현
책수 : 4책
내용 : 조선 선조(宣祖) 때 대표적인 성리학자 고봉(高峰) 기대승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시는 장시(長詩)·배율(排律) 등 거운(巨韻)이 많고 차운(次韻)은 친지들과 주고받은 것이 많다. 그리고 [논사록(論思錄)]은 선조(宣祖)의 명으로 당시의 검열 허봉이 경연에서 고봉의 각론 중 중요한 대목을 뽑아낸 것인데, 저자의 정치적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 퇴계(退溪) 이황과 8여 년간에 걸쳐 성리(性理)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변한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의 내용은 이후 성리학자들의 성리학 연구의 핵심이 되었다.

저본 : 행주기씨(幸州奇氏) 종중에서 중간<석인본(石印本, 1970)>한 『고봉선생문집』
간행년도 : 1989∼1997, 민족문화추진회

구성 : * 제1책 : 고봉선생집 서(序), 고봉선생 연보, 고봉선생문집 권1 - 시, 고봉선생문집 권2∼3 - 문(文)·발문(跋文)·후지(後識)

* 제2책 : 고봉선생문집 속집 권1 - 시, 고봉선생문집 속집 권2 - 서(書)·잡저(雜著)·서(序)·발(跋)·제문(祭文)·논(論)·책(策), 고봉선생문집 별집 부록 권1 - 제문, 고봉선생문집 별집 부록 권2 - 만장(挽章)·월봉서원사실(月峯書院事實)·소(疏)·논사록, 부록

* 제3책 :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

* 제4책 :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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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찬 및 간행

고봉집(高峯集)은 1629년(인조 7) 고봉의 손서(孫婿)이자 선산 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선산에서 목판(木板)으로 3권 3책을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9)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7 기대승-고-판)에 소장되어 있다.
이에 앞서, 고봉이 죽은 직후인 1572년 12월에 선조(宣祖)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篈)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말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초출ㆍ편집한 후 논사록 2부를 만들어 1부는 고봉의 집에 보내주었다. 이를 조찬한이 고봉집을 간행한 다음 해인 1630년(인조 8) 선산에서 목판으로 2권 2책을 간행하고 속집(續集)이라 하였다. 고봉집(원집)과 논사록(속집)을 모아 5권 5책으로 만든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奎1475)에 소장되어 있다.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이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 퇴계가 돌아가신 후, 고봉은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이 별세하자, 고봉의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빠졌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기효증의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 6) 봄에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선생왕복서라 이름하였다.
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初名은 趙준)의 협조로 1786년(정조 10)에 중간하였고, 양선생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의 도움을 받아 1788년(정조 12)에 중간하였다.
1907년(순종 1)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의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및 후현(後賢)의 글을 수집ㆍ편차한 속집(續集;속집 2권, 부록 1권) 3권 2책과 별집부록(別集附錄) 2권 1책을, 고봉집(원집)ㆍ논사록ㆍ양선생왕복서ㆍ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와 합편하여 15권 11책을 목판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만송 D1-A154A)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4)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15대손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 행주기씨(幸州奇氏) 종중(宗中)에서 중간본에 따라 석인(石印)으로 삼간하였다.(삼간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古819.52-G347g),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4a)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번역대본은 1970년에 간행된 삼간본이다.


5. 저본의 구성과 내용

고봉집은 원집(연보 포함) 3권 3책, 속집 3권 2책, 별집부록 2권 1책, 논사록 2권 1책, 양선생왕복서 3권 3책,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 2권 1책 합 15권 11책으로 되어 있다. 이중 원집은 10행 18자이고, 연보ㆍ속집ㆍ별집부록ㆍ논사록ㆍ양선생왕복서ㆍ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 등은 10행 20자이다.
원집은 권수(卷首)에는 장유(張維)와 장현광(張顯光)의 서문(1629년) 및 고봉연보(高峯年譜)가 있다. 권1에는 시(詩) 209제 336수가 시체(詩體)의 구분이 없이 내·외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권2에는 표 9편ㆍ전 1편ㆍ상량문 1편ㆍ주 2편ㆍ서계수답 1편ㆍ의 2편ㆍ설 2편ㆍ소 4편ㆍ장 6편ㆍ비 1편ㆍ차 1편ㆍ논 3편ㆍ기 7편ㆍ제문 9편ㆍ악장 1편ㆍ축문 1편 등이 있고, 권3에는 묘갈명 6편ㆍ신도비명 1편ㆍ묘갈기 1편ㆍ묘지명 2편ㆍ묘기 2편ㆍ광명 1편ㆍ선정비 1편ㆍ행장 3편ㆍ서(書) 9편ㆍ발 2편 등이 있다. 권미(卷尾)에는 조찬한의 발문(1629년), 기영환(奇永桓)의 후지(後識;1970년)가 있다.
속집은 권1에 시가 227제 340수가 있고, 권2에 서(書) 6편ㆍ잡저 4편ㆍ서(序) 1편ㆍ발 1편ㆍ제문 1편ㆍ논 1편ㆍ책 1편이 있다. 부록으로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과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이 있다. 조찬한은 고봉집 발문에서 “장편시는 한유(韓愈)와 유사하고 단편은 도연명(陶淵明)에 가까우며 변론은 구양수(歐陽脩)ㆍ한유(韓愈)와 같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으며 사서(史書)에 해박하여 널리 원용하고 고증하여 남김없이 다 분석하였다.”고 고봉의 시문을 평가하였다.
별집부록은 권1에 제문 20편, 권2에 만장 55편ㆍ월봉서원사실ㆍ청향소 등이 있으며, 권미에 기동준(奇東準)의 후지(1907년)가 있다.
논사록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내용(명종 때 1회, 선조 때 18회)을 모은 것으로 고봉의 정치적 식견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렸다 하여 재상과 경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언로를 열어 언제나 대간을 통하여 여론을 들을 것, 재용을 절약하고 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할 것, 예의를 숭상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견고히 할 것 등이다. 논사록은 상ㆍ하편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부록에는 효종(孝宗)의 치제문, 정조(正祖)의 치제문과 전교가 있고, 김종수(金鍾秀)의 발문(1786년), 조찬한의 소지(小識;1630년), 기세훈의 후지(1970년)가 있다.
양선생왕복서는 고봉이 퇴계와 13년간 서로 왕복한 편지를 모은 것이다. 기효증은 후지에서 “왕복서에는 학자들의 학문하는 공정과 사군자의 출처의 도리, 조정의 예제(禮制) 등을 논하였으며, 또 의리를 분변하고 이단을 물리친 학설을 모두 상고하였으므로 쉽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권미에 기효증의 후지(1614년)와 김익(金熤)의 발문(1788년)이 있다.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는 고봉이 퇴계와 왕복한 편지 중에서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에 관한 서간을 모은 것이다. 권미에 부록으로 ‘고봉이 추만에게 답한 글(高峯答秋巒書)’ 2편과 정추만의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 기형섭의 변록(辨錄;1970년), 기우흥(奇宇興)의 후지(1970년)가 있다.
사칠논쟁은 한국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퇴계가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 發於理 七情 發於氣]”라고 한 것을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 理之發 七情 氣之發]”라고 수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고봉이 “사단과 칠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비시키고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사단과 칠정에 분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퇴계는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라고 제시하고, 이기불리(理氣不離)의 견해에서 이발(理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봉의 입장은 이허설(理虛說)로 빠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고봉도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자신의 학설은 인설(因說)로 퇴계의 학설은 대설(對說)로 구별하고, 사단에 있어서 이발은 인정하지만 성정(性情)은 기(氣)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주장하여 이기를 분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후 퇴계는 논변을 더 이상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논쟁을 중지하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은 당시의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칠논쟁으로 학계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고 다양해졌고, 이후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의 논변을 거치며 조선시대 성리학에 큰 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290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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