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씨의 시작
시조는 기우성(奇友誠). 백제 온조왕(溫祚王)때 시중(侍中)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행주(幸州)에 세거, 행주로 관향을 삼았다.
기(奇)씨는 행주(幸州) 단일본으로 3천여 년의 긴 역사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다.
기원전 1120년경 은(殷)나라의 종친(宗親)인 자서여(子胥餘)는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으면서 기자(箕子)라 불리었으며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함께 은나라 말기(末期)의 세명의 어진 사람이었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방탕한 생활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기자(箕子)는 간곡히 말렸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고 기자는 머리를 풀고 미친척하고 돌아다니다 주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었다.
새로 일어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覇權)을 잡은 후에 감옥에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기자는 은나라의 종친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적군에게 구원된 것이 부끄러워 따르는 무리 오천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따라온 사람들은 100가지 기술을 가진 기술자와 학자들이었다. 처음 조선에 들어와 길쌈, 누에치기등의 문명과 학문을 가르쳤고 8조의 금법(禁法)을 시행하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을 전해들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였고 봉함을 받은 기자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관(朝觀)을 왔고 이때 무왕에게 홍범(鴻範)을 설명하였다. (다른 기록으로는 무왕이 감옥에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고 이어서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을 설명한 후, 동쪽의 조선으로 가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나라의 옛 궁궐터를 지나며 잡초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불렀다.
세월이 지나 주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燕)나라 제후(諸候)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이웃에 있는 기자조선을 침략하려하자 조선후(朝鮮候)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연나라를 마주 공격하여 주나라를 도우려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가 간곡히 만류하므로 예(禮)를 연나라에 보내 협상하여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다.
차츰 기자조선왕이 중화 나라에 맞설 만큼 당당하고 강성하여 졌다, 연나라가 가장 전성기인 기원전 311년에서 279년 사이의 소왕(昭王) 때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 변두리의 땅 2천여리를 빼앗기고는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서기전 214년에 요동까지 만리장성이 연결될 때는 기자의 40세손 기비왕(箕否王) 시대로 강성한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속(服屬)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조회(朝會)하지 않았다.
기비왕(箕否王)이 죽고 41세손 기준왕(箕準王)이 즉위하여 20여년이 흘러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국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많은 주민들이 기자조선으로 넘어와 망명하였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에 한나라의 노관(盧綰)이 제후국 연나라의 왕으로 있다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러한 혼란기인 서기전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조선의 패수를 건너와 기준왕(箕準王)에게 투항하고 살 곳을 요청했다. 기준왕은 박사(博士) 벼슬과 제사의식 때 쓰는 규(圭)를 하사하였고 서쪽 땅 일백리(一百里)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며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기존에 피난 와서 살고있는 연, 제, 조나라 출신의 주민과 한나라에서 계속 망명해오는 주민을 꾀어서 세력을 키운 후, 서기전 194년경에 기준왕에게 한(漢)나라 군사들이 열갈래로 나누어 침략해오니 도성(都城)에 들어가 왕을 보호하겠다 거짓보고하고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공격하였다.
기습으로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은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바다로 피신하여 마한(馬韓) 땅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왕(箕準王)을 애왕(哀王)이라 하며 마한시대의 기준왕은 무강왕(武康王)이라 한다.
숭인전비와 위지(魏志)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무강왕(武康王), 기준(箕準)의 8세손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세 아들이 있으니 우평(友平)은 용강(龍岡)으로 돌아가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마한(馬韓)의 옛 제도에 따라 상당(上黨 ; 청주) 한(韓)씨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서 덕양(德陽 ; 행주) 기(奇)씨가 되었다. 기자로부터는 49세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기록에는 우리 기(奇)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 ; 서울)의 북(北), 즉 행주(幸州)로 옮겨진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때의 기록들이다.
온조왕 10년, BC 9년 가을 9월, (온조)왕은 사냥을 나가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十年秋九月王出獵獲神鹿以送馬韓)
온조왕 13년, BC 6년 여름 5월 (온조)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한 날이 없고 나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앞으로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하지 않을 것 같다.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한강의 남쪽을 돌아보니 땅이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하여 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했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울타리를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도읍 옮긴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한 것이 북으로는 패하, 남으로는 웅천, 서로는 대해, 동으로는 주양을 한계로 하였다.(八月遣使馬韓告遷都遂定疆北至浿河南限熊川西窮大海東極走壤)
온조왕 18년, BC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 오니 (온조)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마주쳐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다 무찔러 버렸다.
온조왕 24년, AD 6년 가을 7월, (온조)왕은 웅천에 울타리를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에 발을 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백리땅을 나눠주어 안정되게 하였으니 왕에 대한 대접이 후하지 아니함이 아니니 마땅히 보답할 바를 생각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완전하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와 더불어 당적할 이 없다고 여겨 성과 해자를 크게 만들고 우리의 지역을 침범하니 그러고도 의리가 있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온조)왕이 부끄럽게 여겨 그 울타리를 헐어버렸다.(二十四年秋七月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其待王不爲不厚宜思有以報之今以國完民聚謂莫與我敵大設城池侵犯我封疆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
온조왕 25년, AD 7년, 봄 2월 대궐 안에 있는 우물믈이 갑자기 넘치고 서울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해석자가 해석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의 발흥의 징조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뚤인 까닭은 대왕이 이웃나라를 합병할 응보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먹었다(王宮井水暴溢漢城人家馬生牛一首二身日者曰井水暴溢者大王勃興之兆也牛一首二身者大王幷國之應也王聞之喜遂有幷呑辰.馬之心)
온조왕 26년, AD 8년, 가을 7월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상하가 마음이 이탈되니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하겠다, 혹시 다른 자에게 병합된다면 마치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격이 될것이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소용있느냐? 남보다 앞서 빼앗아 뒷날 곤란한 것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二十六年秋七月王曰"馬韓漸弱上下離心其勢不能久爲他所幷則唇亡齒寒悔不可及不如先人而取之以免後艱") 겨울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 핑계대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 금현 두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遂幷其國邑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 AD 9년, 여름 4월, 원산,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二十七年夏四月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온조왕 34년, AD 16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몸소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니 주근이 스스로 묵을 매어 죽으므로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또한 그 처와 자식까지 죽였다.(三十四年冬十月馬韓舊將周勤據牛谷城叛王躬帥兵五千討之周勤自經腰斬其尸幷誅其妻子)
이상의 내용을 보면 준왕이 위만에게 당한 것과 똑 같이 마한왕은 온조왕을 위해 백리의 땅을 나눠주었고 그후 외적의 추장도 사로잡아보내고 신록도 보내고 도읍 옮긴것도 보고하고 하니까 신임하다가 결국 당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족보에서 1982년판 14쪽 첫줄에는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마한 침쇠하니 백제 시조 온조왕 26년 무진에 승마한 하여 병기국하니라고 해서 삼국사기 내용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마한이 완전히 망한해를 원산과 금현이 항복한 해를 온조왕 27으로 했으나 우리 족보는 온조가 마한을 침략한 온조왕 26년을 마한이 망한해로 기록했다 그러나 내용을 이해 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다.
시조 기우성할아버지는 지방 성의 성주로 계시면서 최후까지 백제에 저항하신 듯하다. 우리는 마한의 마지막 충신 주근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여기에서 당시의 백제의 서울, 한산의 북은 당연히 우리 기씨의 본관 행주이다. 그러나 행주(幸州)로 옮겨진 후 백제시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기(奇)씨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않다. 다만,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幸州洞)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안에는 우리 기씨의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傳說)이 깃든 기가(奇哥)바위, 사시면서 달게 맛있게 드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 있어 기록을 대신한다.
세계상(世系上)의 1세조는 고려(高麗) 인종조(仁宗朝)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신 순우(純祐) 할아버지이다. 선대(先代)를 제쳐놓고 순우(純祐)를 1세로 치는 이유는 한때 선대의 세계를 잃었기 때문이다. 고세계본(古世系本)을 선조(宣祖)때 영의정을 지낸 자헌(自獻)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괄의 난에 재화(災禍)를 당해 피난하는 바람에 잃고, 1688년 숙종 14년에 무진보(戊辰譜)를 수보할 때 선대(先代)를 정확히 계대할 수 있는 기록으로 가장 빠른 순우(純祐)를 1세조로 하여 기록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없어져 버린 것으로 알았던 고세계본(古世系本)이 자헌의 동생, 윤헌(允獻)의 아들, 수실의 집에서 뒤늦게 발견돼 실전됐던 66세대의 행적을 소상히 알 게 됬다. 그러나 순우(純祐)할아버지를 1세조로 하여 기록하는 전통은 이어오고있다.
세계(世系) 시조인 기순우(奇純祐)는 고려 인종(仁宗)때의사람으로 문림랑(文林郎)을 지내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수전(守全)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사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師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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