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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설(고봉선생이 학문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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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328회 작성일 21-03-14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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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이것은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려는 생각을 갖기 위한 것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가지고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19년 전의 일부터 차근차근 서술하려 한다.
나는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정해년(1527)에 태어났으니 그 해가 곧 중종 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었고 7~8세쯤 되어서는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를 의지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고생하시면서 길러주셨다. 나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으려다 살아났는데, 오늘에 이르러 아득히 그 일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아, 백성으로서 곤궁하기가 누가 나보다 더하겠는가? 가끔 어릴적 일을 생각해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으나 또한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1533)에 비로소 집에서 수학하였고, 다음해인 갑오년(1534) 7월에 망극의 비통함을 당하여 이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다시는 학문을 일삼지 않았다(어머니 강씨의 죽음). 대체로 아버지께서도 역시 방금 대변(大變)을 당한 터라 글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을미년(1535)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도 배우고 또 《소학(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됨으로 인하여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도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꽤 진취의 희망이 있었다. 그해 겨울부터 정유년(1537) 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는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후로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는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書堂)으로 가서 《대학(大學)》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 및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고 나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었다. 이로써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하고 또다시 올라가서 《맹자(孟子)》 및 《중용(中庸)》을 읽었고 항상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고 또한 다른 저술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학문의 자질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었는데, 그때가 무술년(1538) 이었다. 이때, 나의 외할머니의 외할아버지의 첩(妾)이 가문의 지위 때문에 항상 여러 손자들을 사랑하여 돌보았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 여읜 것을 불쌍히 여겨 매우 극진히 돌보아주었다.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듣고 보는 것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였었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집안에 화(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매우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다음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그 해가 바로 기해년(1539) 이었다. 이때 선배(先輩)들이 성균관에서 뽑는 생원진사시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는데, 나도 그것을 따라 배웠더니 또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가송(歌誦)에 대해서는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는 맞추지 못했지만, 혹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께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로는 경자년(1540)이요, 달로는 정월이었다. 그 후 점차로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취되어 갔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이르러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外叔父)께서 문과에 급제하고 가을에 이르러 성묘(省墓)를 하러 이곳에 오셨다. 외숙부께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고찰하시고 또 그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시었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상자 속에는 그 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전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었다. 다음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1540)부터 신축년(1541)까지 사이의 8개월 동안과 신축년(1541)부터 임인년(1542)까지 사이의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모두 18개월이요, 햇수로 따지면 1년 반 남짓이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게을러져서 글을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수시로 느껴 분발하여 기세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역시 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아버지께서는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시었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니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편안함을 내내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나이가 장성해질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해가 오랠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보잘 것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1541)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가 돌아가셨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사(養嗣)로 삼아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들을 마치 자식처럼 여기시어,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주시었다. 소자(小子)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시어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시니, 이 원한을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지난해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어찌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 봉양하는 일을 비롯하여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에 의뢰하여 공급할 것인가?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告)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종아이들은 누구에게서 명령을 받아 일을 해나갈 것인가? 밤낮으로 학문을 계속하여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조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아 슬프다, 아 슬프다! 이해(1541) 늦은 봄에, 모두 1백 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용산(龍山)이 이글을 보고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의당 그 성문(聲聞)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다. 생각이 멀고 기(氣)가 장대하며, 말이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설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다만 이것은 조그만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문득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일찍이 서정부(西征賦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지은 문장 이름)를 차운(次韻)하여 지으려 했다가 미처 짓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다음해(1542) 봄에는, 이해 가을에 과거(科擧)가 있어서 시험 삼아 시부(詩賦)를 지어보았다. 그러나 학문의 근원이 거칠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천지 사이에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곤궁의 걱정 없고 농사짓는 괴로움도 없었다. 그런데 포기하고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 세상에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하고, 이것으로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수일 후에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역시 거기서도 글을 열심히 짓지는 않았으나, 시험 삼아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었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다. 나도 역시 집에 내려와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하여 하루 사이, 한번 읊는 동안에도 옛것을 익히고 연구하여 부(賦)를 모두 10여 수 지었다.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를 모두 1백여 구(句)씩 지어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기대가 있게 되었다. 가을에 이르러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한 생각도 마음에 가짐이 없이 그럭저럭 그해(1542)를 마치면서 보던 것은 오직《대학(大學)》한 책뿐이었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山寺)에 올라가 있으면서 원부(元賦)의 초(抄)한 것을 외곤 하였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는 두절된 연못가에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길이 생각을 하여도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락하였으므로, 하나라도 얻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내가 책을 싸들고 산재(山齋)로 가 있는 동안 때는 이미 초여름이 되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諸生)들을 불러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좇아가서 함께 어울려 지내며 언뜻 세월을 보내고 6월 그믐에는 파접(罷接)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놓고《소학(小學)》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이어서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길이 또 매우 멀어 한번 출입하기가 힘들어서 쉬었다 하면 4~5일씩 쉬어버림으로써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지니, 그 폐단을 ?肩?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가고 오고 하는 가운데 언뜻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다음해 갑진년(1544)엔 목사 송공순(宋公純)이 유생(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 되었으면 곧 학업 성취도의 여하를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 때문에《맹자(孟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다가 4월 보름에는 용산 선생(龍山先生)을 찾아 뵈었다. 5월에는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시었다. 부를 다 지으니, 선생께서는 자주 칭찬하였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만을 읽고 돌아오니,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는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쳐 마냥 누워서 책상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문선(文選)》을 강독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2권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라 또 세모를 만났다.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 생각하기를,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뜻이 견고하지 못하고 그동안의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었다. 아, 내가 태어난 날이 정월 초하루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백 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 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햇수도 적은 햇수가 아니건만, 포기를 해버리고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생각에 못 이겨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사리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나간 일들을 편차하여 행해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써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을 뿐이요, 말의 이외에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接)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격하고 분발하는 데에 또한 반드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이미 익히 계산되어 있으나, 그것은 쉽게 붓으로 다 쓸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다시 말하지 않는다.
2004-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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