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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씨가승》 서〔奇氏家乘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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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01회 작성일 23-03-2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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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씨(奇氏)의 원류는 멀지만 씨족(氏族)은 크지 않은데, 중엽에 또한 뿔뿔이 흩어져 그 거처가 대대로 전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무릇 성한 때에 편찬된 계첩(系牒)이 그 가세(家世)의 고실(故實)과 함께 거의 다 흩어져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제 간직된 것에서 신적(信蹟)할만한 것으로는 대략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근고(近古)의 기사 - 우리의 숙종15년 - 보(譜)인데, 고려 때의 평장사(平章事) - 휘는 순우(純祐) - 이후 내외의 자손과 종지(宗支)가 자세하다. 또 다른 한 편은 안악(安岳) - 상국 자헌공(自獻公)의 아우 윤헌(允獻)으로 일찍이 안악 군수를 지냈다. - 의 집에 소장된 세계(世系)인데, 위로 성씨를 얻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가 이에 은사(殷師)까지의 세차(世次)ㆍ명휘(名諱)와 이력(履歷)의 대강을 실었다. 갑오 - 우리의 영종15년 - 보에 이르러 비로소 합해 하나가 되도록 하였으니, 기씨 문헌이 무너지지 않고 다행히 전한 것은 그 속에 모았다. 이를 이어서 그 근거를 수행하고 서술하는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연대가 면면히 이어져 기록이 아득하니 위로는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여 의혹됨을 만의 하나라도 면치 못할까 두려웠고, 아래로는 멀고 가까운 동족을 똑같이 합록(合錄)하여 특별한 구별이 없어서 그 친근한 쪽을 극히 자세히 했으니, 이로써 가승(家乘)을 편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성사(聖師)가 동쪽에 거처하니 떳떳한 인륜이 펼쳐져 동토(東土)의 중생(衆生)이 만세토록 덕을 보고 있다. 마한(馬韓)이 남쪽으로 옮긴 것은 사람을 기르는 토지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이었으니 그 근본이 깊고 두터워 진실로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으로는 기(奇)ㆍ한(韓)ㆍ선우(鮮于)의 세 성씨로 진실로 오랜 계통을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빛난 지가 2천년이 넘었다. 그 근본과 근원이 오래되었으나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기씨만이 최고가 되어 진실로 이른바 ‘콸콸 솟는 긴 근원이요, 무성하고 무성한 큰 나뭇가지’ 것이다.
삼가 그 성씨를 얻은 뒤로 세차의 전함을 기술하여 성계(姓系)를 제1로 삼았는데, 삼한(三韓)이 혼란하여 어지러운 때에 대대로 무훈(武勳)이 드러나더니 성조(聖朝)가 도읍을 정해서는 집안에 유학이 전해져 세풍(世風)의 성쇠와 관계되더라도 오직 이모(貽謨)의 빛남이 있었다. 또한 먼 사람은 증거할 수 없으나 가까운 사람은 계고(稽考)할 수 있어서 삼가 우리 정무공(貞武公) 이래의 세덕(世德)의 전함을 편차하여 가전(家傳)을 제2로 삼으니, 성인이 복제(服制)를 정할 때에 고조(高祖) 이하로부터 옛날의 족보를 만든 사람이 그것을 따랐다. 대체로 한 사람이 나뉘어 천만 사람이 되고, 천만 사람은 본래 한 사람의 몸으로 성인이 천만 사람을 한 몸처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인정(人情)을 꿰뚫지 못한 바가 있었고, 사세(事勢)가 시행되지 못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삼가 정무공 이하 동고조의 친함으로 편차하여 세보(世譜)를 제3으로 삼았고, 세 편을 합하여 이 가승(家乘)을 만들었다.
승(乘)이란 사(史)이다. 사의 폐단은 속임이니, 때문에 이 편집은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여 감히 사의(私意)를 그 사이에 뒤섞지 않았는데, 죄가 있을지 죄가 없을지 일필(一筆)로 결단을 낸 구절이 있어 두렵도다.
후세의 씨족은 대체로 현성(賢聖)의 후손들이 많은데, 그 세대가 멀어지고 유택(遺澤)이 끊어짐에 미쳐서는 성쇠가 서로 교체함이 없지 않으니 심한 것은 간혹 전복되어 구제할 수도 없다. 이제 우리 집안은 10세 이래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없어서 오늘날 기씨 성으로 사적(仕籍)에 오른 사람이 없다. 동방에 기씨가 있을 때부터 오늘날과 같이 쇠퇴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생각해보니, 청자(靑紫)가 많아 융성한 것이 아니고, 곤약(困約)이 쇄미해져 쇠약한 것은 아니다. 조종(祖宗)의 마음이 서로 전해지고 있는가와 그렇지 아니한가, 조종의 법을 서로 강(講)하며 서로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가세(家勢)의 실추와 실추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이를 보아 알 수 있다. 조종의 덕이 없이 그 관록만 있다면, 다만 스스로 그 전복을 빠르게 할 뿐이다. 우리 조부로부터 벼슬자리는 드날리지 못하였으나 산자락에서 덕을 수양, 남방 유림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대를 이었다. 이제는 비록 이에 미치지는 못하나 부형들의 말씀 덕분에 오히려 종학적문(種學績文)할 줄을 알아서 가풍 속에서 머뭇거리고 감히 방자하게 의롭지 못한 일은 하지 않는다. 진실로 이로부터 게으르지 않고 더욱 전진하여 그 미치지 못했던 것에 이른다면, 또한 어찌 결국 쇠퇴함이 있겠는가.
조종의 남긴 덕이 대략 이 편집에 갖추어졌으니, 우리 씨족이 그 가문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을 도모한다면 여기에서 찾아도 넉넉할 것이다. 서로 함께 힘을 쓰도록 하자. 그러나 이 글을 편집한 사람은 나다. 그래서 가전부(家傳部) 중의 세 장은 뭇 씨족과 통틀어서 같이할 수 없음이 있으니, 이 편집한 것을 소장하고자 하여 각자 그 친근한 3세 - 주로 고조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 - 로 바꾼다면, 거의 통틀어 같이할 수가 있다.

[주-D001] 그 거처 :
    《서경》 〈홍범(洪範)〉 첫머리에 “하늘이 암암리에 백성의 운명을 정해 놓고 그들의 삶을 돕고 화합하게 한다.[惟天陰騭下民, 相協厥居.]”라는 말이 있다.

[주-D002] 숙종15년 :
    1689년이다.

[주-D003] 종지(宗支) :
    종중(宗中)에서의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통틀어 한 말이다.

[주-D004] 안악(安岳) :
    황해도에 있는 지명이다.

[주-D005] 자헌공(自獻公) :
    기자헌(奇自獻, 1562~1624)을 말한다. 본관은 행주(幸州)요, 자는 사정(士靖)이며, 호는 만전(晩全)이다. 1590년(선조2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ㆍ부제학(副提學)ㆍ대사헌(大司憲)ㆍ우의정ㆍ좌의정을 지냈다. 이 무렵 선조가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여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614년(광해군6) 영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그 불가함을 극간(極諫)하다가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을 모의할 때 김류(金瑬)ㆍ이귀(李貴) 등이 의사를 타진해 오자,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 내응(內應)할 우려가 있다 하여 사사(賜死)되고, 일족도 몰살되었다. 후에 이원익(李元翼)ㆍ이귀 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주-D006] 윤헌(允獻) :
    기윤헌(奇允獻, 1575~1624)을 말한다. 본관은 행주(幸州)요, 자는 헌보(獻甫)이며, 초명은 충헌(忠獻) 또는 내헌(乃獻)이다. 응세(應世)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자헌(自獻)의 동생이다. 1605년(선조38)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광해군 때 공조정랑(工曹正郞) 등을 지냈다. 1614년(광해군6)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승진되고, 곧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議院文學)ㆍ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냈다. 1617년 형 자헌이 광해군의 폐모론을 반대하여 유배될 때, 함께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내응할 우려가 있다 하여 자헌이 참살되고, 그 뒤 장살되었다. 뒤에 죄가 풀리고 관직이 복구되었다.

[주-D007] 은사(殷師) :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箕子)를 말한다.

[주-D008] 영종15년 :
    1739년이다.

[주-D009] 성사(聖師) :
    원래는 공자(孔子)를 뜻하나 여기서는 기자(箕子)를 말한다.

[주-D010] 중생(衆生) :
    범어 sattva의 음역인 살타(薩埵)를 의역한 불교 용어로, 함식(含識)이라고도 한다. 영성(靈性), 즉 심식(心識)을 함유(含有)한 유정(有情)이라는 뜻으로, 곧 중생을 가리킨다.

[주-D011] 마한(馬韓) :
    고대 삼한(三韓) 가운데 경기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방에 걸쳐 있던 나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의 〈기이 제1(紀異第一)〉에서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의 말을 인용하여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왕인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좌우의 측근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주-D012] 콸콸 …… 근원이요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근원이 좋은 물이 콸콸 흘러서 밤낮을 그치지 아니하여 구덩이가 가득 찬 뒤에 전진하여 사해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라는 말이 있다.

[주-D013] 도읍을 정해서는 :
    원문의 ‘정정(定鼎)’은 나라의 도읍지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하우(夏禹)가 구정(九鼎)을 주조하여 구주(九州)를 상징하였는데, 그 뒤 상(商)과 주(周)를 거치는 동안 이를 전국(傳國)의 보배로 여겨 국도(國都)에 안치하였으므로, 나라의 도읍지를 정하는 것을 정정이라고 하게 되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3년 조(條)〉에 “성왕이 겹욕에 도읍을 정하여 구정을 안치하고 점을 쳐보매, 세대 수는 삼십 세요 연수는 칠백 년이었으니, 이게 바로 하늘이 명한 것이다.[成王定鼎于郟鄏, 卜世三十, 卜年七百, 天所命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4] 이모(貽謨) :
    이모(貽謀)와 같은 말로 조상이 자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남겨 주는 것을 뜻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豊水有芑, 武王豈不仕?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D015] 정무공(貞武公) :
    정무는 기건(奇虔, ?~1460)의 시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요, 호는 청파(靑坡)이다.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1442년(세종24)에 지평(持平)이 되었고, 그 뒤로 제주 목사ㆍ전라도 관찰사ㆍ개성부 유수ㆍ대사헌ㆍ한성 부윤ㆍ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후에 조정에서 출사할 것을 몇 차례 청하였으나 끝까지 고사하였다. 전남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주-D016] 미더운 것은 …… 전하여 :
    역사를 기록하면서 임의대로 취사하지 않고 분명한 사실은 분명한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일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5년 조〉에 “춘추의 의리는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이다.[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주-D017] 청자(靑紫) :
    한나라 때에는 공후와 구경(九卿)이 각각 자수(紫綏)와 청수(靑綬)를 찬데서 유래하여 고위 관원을 의미한다. 《삼국지》 권25 〈위서(魏書) 고당륭전(高堂隆傳)〉에 선비가 경술에 밝지 못한 것이 흠이지 만약 경술에 밝기만 하다면 “존귀한 관직을 얻는 것은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其取靑紫如俯拾地芥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8] 종학적문(種學績文) :
    학문을 닦고 문장을 쌓는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에 “박릉 최사립이 학문을 닦고 문장을 쌓아 그 소유를 쌓으니, 널리 포함하고 멀리 흘러가 날로 커져서 퍼져갔다.[博陵崔斯立種學績文, 以蓄其有, 泓涵演迤, 日大以肆.]”라고 하였다. 〈남전현승청벽기〉는 아전들에게 휘둘리는 말단 관리의 애환과 그를 극복하고 청사의 면모를 일소한 최사립의 일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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