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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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스페셜 기황후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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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76회 작성일 21-02-2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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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 1일 역사스페셜 )

https://youtu.be/iE8FRcCFM-8

< 미스 고려 , 기 황후 대원제국을 장악하다 . >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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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 몽고 초원 ( 16 )

몽골초원에서 일어나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원제국 ,

-초원바뀌면 대원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기 황후 ,

# 기 황후 ( 6 )

역사는 그녀를 고려 여인이라고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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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기본 셋트 .

징기스칸이 세운 대원제국......
원나라 하면 지금까지 전 세계의 역사를 통 털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입니다 .
자, 이 지도를 한번 보실까요 ?

# 두루마리 같은 데서 지도가 내려온다 .
- 원 제국만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다 .

14세기 초반의 세계 지돈데요 ,
푸르게 색칠된 부분이 다 원나라의 영토입니다 .
고려가 있는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모스크바를 거쳐 인도 북부 ,
아프카니스탄의 수도인 카불 ,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동유럽까지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엄청난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입니다 .
이런 나라의 황후가 고려 여인이라니 , 어떻게 된 일일까요 ?

더군다나 기 황후는 단순히 황후의 자리에만 올랐던 게 아니라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원나라 전체를 휘두르는 실권을 행사했던 황후였다고 합니다 .

황후가 이렇게 실권을 장악하고 대륙을 뒤흔든 경우는
중국역사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하는데요 ,
고려여인으로 태어나 대원제국의 황후가 된 기 황후 ,
오늘 < 역사스페셜 > 에서는 기 황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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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

# 차 런( 4 )

# 운거사 줌인(10)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75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운거사 ,

#사람들( 5 ) 세계적인 불교 문화유산들이 많은 이곳은
일년 내내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

#경내팬 비석+사진 (15)
운거사가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 여 년전 ,
사찰의 경내에서 오래된 불교 관련 자료들이 많이 발견돼
북경의 돈황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

#석경산 ( 13 )

운거사는 사찰 바로 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석경산 때문에 더 유명하다 ,
전체가 거대한 돌산인 석경산 ,

#걸어가는 모습( 5 )
석경산에는
수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는 천 여년 동안
승려들이 직접 산에 올라 새긴
석경들이 보관돼 있다 .




# 굴 보이고 ,폐쇄

석경이란 법난을 피해서
경전을 영원히 보관 하기 위해 돌에 새긴 경전들 ,
승려들은 돌에 경전을 새겨
이것을 굴속에 보관했다 .

#팬(5) 현재 석경산에서 석경이 보관된 굴은 모두 7개 ,


#화엄굴 TR( ) 그중 화엄당만이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다 .

석경산의 굴들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인
수나라 때 새겨진 석경들이 보관된 곳이다 .

-실내 경들TR(24) 삼면의 벽을 가득 메운 경판은
화엄경과 법화경 , 금강경등의 대승경전들 ,
7개의 석굴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경판들인
이곳의 석경들은 천년의 세월 탓인지
곳곳에 깨어지고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

#피디보고( 2 )
그런데 석판을 살펴가던 중
낯익은 글자를 발견했다 .

#혜월(12 )
고려라는 나라 이름과 승려 혜월의 이름이었다 .
고려 승려의 이름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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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 황유복 ( T 13 - 0338 )
~~~ 화엄당이 원말에 많이 파손이 됐다.
그걸 혜월 스님이 발견하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산을 내려와서 모금활동을 벌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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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7 )

중국 북경에 있는 거대한 석경의 보수작업에
고려의 승려가 어떻게 참가를 하게 된 것일까 ?


#CG ( 24 ) 석경의 중수를 끝내고 세웠다는 비석
< 중수 화엄당 본기 >의 내용을 보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

고려승려 혜월의 주도하에 보수를 하는데
자정원사 고용보가 백만냥을 시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자정원사 고용보는 누구이며
왜 백만냥이나 시주를 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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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 .
자정원은 2 황후로 등극하면서
기 황후가 필요한 자금관리를 하던 기구 .
고려 환관들이 있어 , 고용보가 초대원사를 했고.
기 황후가 원말에 원실의 정쟁에서
부각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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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 13 )+ #풀샷 ( 5 )

그러니까 화엄당의 보수에 백 만냥이나 시주를 한
자정원은 원나라 기 황후의 재정기구였다 .
그렇다면 , 고려국 승려 혜월의 청을 받아들여
석경산 화엄당의 보수에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한 원나라의 기황후는 누구일까 ?

#<원사> - 후비열전 넘기고 ( 16 )

원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 원사 >
이곳 < 후비 열전 >에는 모두
10명의 황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책장 넘어가 글자( 16 )
그 중 몽고이름이 완자홀도로 나타나있는 기황후 ,
< 원사 > 는 그를 고려인이라고 적고 있다 .

#찾아가고( 8 )
effct...

기 황후의 본관은 행주 기씨 ,

#피디 들어가고( 6 )
행주 기씨 종친회를 찾아
기 황후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

#족보 꺼내고 ( 13 )
먼저 족보에서 기황후를 찾아보기로 했다.

#족보 넘기면
-기자오의 아들들 ( 19 )

행주 기씨 집안의 72대 손 기자오 ,
족보에는 그에게 다섯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었다고
기록 돼 있다 .

#기황후 ( 10 )
그 중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됐다는 사람은
기자오의 막내딸 ,
그녀는 원의 황태자까지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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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기우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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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샷 ( 12 )
행주 기씨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 여인 ,
그녀는 어떻게 원나라로 건너가
원의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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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 전투도 , MC 그림 좀 보다가 돌아선다 .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입한 것은 1231년 , 고종 18년이었습니다 .
그 후로 몽고는 30 여년에 걸쳐 무려 일곱 차례나 공격을 해 옵니다 .
( 그림 가리키며 ... )
그때마다 고려는 이렇게 치열한 대몽 항전을 벌이게 되죠 .
당시 중국 , 러시아를 비롯해 중동지방까지
무섭게 세력을 뻗어가던 몽고족들에게도
항몽 의지가 강한 고려는 결코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 30여 년에 걸쳐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을 견디다 못해
고종 46년에 이르면 고려도 결국 몽고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
오랜 기간 저항했다는 것 덕분에 몽고에 복속 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을 수는 형태이긴 했으나
이때부터 고려에는 원나라의 공주가 왕비로 오는 것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내정간섭이 시작이 됩니다 .

그 중의 원의 가장 야만적인 요구중의 하나가 바로 공녀입니다 .
공녀.... " 공물로 바치는 여자 " 라는 뜻인데요 ,
원나라는 고려여인들, 그중에서도 고려처녀들을 징발해
원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
원의 이 요구에 따라 수많은 고려여인들이 원으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
행주 기씨 집안의 막내딸이 원으로 건너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공녀의 신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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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 재연 , 기씨 ( 18 )
기록에 의하면 기자오의 딸 기씨는
공녀로 징발돼 원나라에 끌려가
제일 먼저
궁중에서 차 따르는 일을 하는 궁녀였다고 한다 .






# 궁녀도 ( 13 )
실제로 끌려간 고려여인들은
기자오의 딸처럼 이렇게 궁녀로 일하거나
혹은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곳에 배치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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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고려에서의 출신신분에 따라 원의 제왕에게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되기도 했고
그렇지 못한 일반 양인 출신의 자녀경우에는
주점에 끌려가 가기로서 노래하는 기생으로서
비극적인 생을 마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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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집 그림( 20 ) .

제왕이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된 경우는
그래도 대우가 나았다 .
그러나, 대부분의 공녀들은 궁중의 시녀로서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거나
더 심한 경우는 술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

# 원대 풍속도 ( 30 )

원나라의 기록 가운데는
이렇게 공녀로 징발돼 온 고려여인이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이나
심지어는 술집에서 고려여인이 시중 드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글들도 많다 .

-자막 보자가....

그렇다면 ,
이들 고려여인들은 왜 공녀로 뽑혀
이렇게 고생을 하는 타국땅으로 오게 된 것일까 ?

# < 고려사 > 검색 . ...보다가

< 고려사 > 를 통해
공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


-동녀 원이 고려에 여자를 요구할 때는
동녀 , 즉 어린 여자라는 조건을 내세워 요구 했다 .

-검색, 많은 기사. 기록에서도 원이 여러 차례 고려에
공녀징발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

-과부처녀추고별감( 8 ). 공녀에 관한 기록을 읽던 중
이상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
< 과부처녀 추고별감 > ,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

#장동익 교수( 18 )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책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있는
장동익 교수 ,
그는 공녀 제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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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과부처녀추고별감은 기부군 행빈 별감 ,
몽고는 몽고에 투항한 동료에게 가정을 꾸려 주기 위해
고려 여인을 요구, 고려 정부는 이를 위해 각지에
과부와 처녀를 구하기 위해 관료를 파견 ,
이 관료들을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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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표지와 내용 ( 25 )

공녀의 요구가 갈수록 치열해지자
충렬왕 5년에는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

- 자막 뜨고.

혼인을 할 때는 반드시 관에 신고하게 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처벌도 엄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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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홍규는 고려전기 대표적인 귀족가문,
그의 딸이 공녀로 선발되자 피하기 위해
딸을 승려로 만든다.
그러나, 죄를 물어 홍규를 섬으로 유배시키고
딸을 원에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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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공녀(11). 귀족가문의 딸도 피해갈 수 없었던 공녀 징발제도 ,
이런 분위기 속에서 행주 기씨 기자오의 딸도
원나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

#환관그림( 20 ). 원은 비단 공녀뿐 아니라
고려 출신의 환관들도 상당수 요구했다 .
원나라가 이렇게 고려사람들의 징발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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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몽고인들은 몽고인 지상주의 원칙하에
색목인과 한인들을 어느 정도 등용 하긴 했지만
최상 신분층은 몽고인이 차지 , 중상층은 색목인이,
하층 부류는 한인이 . ..
중국의 강남 출신 남인의 경우는 정권참여가 거의 배제 ,
그러한 형편하에서 제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필요 , 학문적인 소양과 정치적인 경륜을 겸비한
고려인을 등용하려고 애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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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0 ) 몽고인들이 민족을 분류한 기준에 의하면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고려인은 3등급의 민족이었다 .

- 자막 뜨고 .

그러나 원을 건설한 세조가 고려인을 평한 글을 보면
고려인의 우수성에 대해 적고 있다 .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고려인은
실제로는 3등급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


#색목인( 23 )
뿐만 아니라 한족의 진출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회의 중추적인 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다 .
특히 원은 한자를 알고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갖춘
고려인을 황궁안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환관과 공녀를 요구했던 것이다 .

#이미지-차 따르는 여인( 15 )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원으로 끌려간
기자오의 딸,
그녀도 차 따르는 시중을 드는 궁녀로
원나라 생활을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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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 한쪽에 < 차 따르는 궁녀 이미지 > . 맞은 편에 < 이곡의 상소문 > .

열 세살에서 열 여섯에 이르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만리 타향으로 떠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요 ?

그러나, 원나라는 처음 고려처녀의 징발을 요구한 1275년 이래
80여년에 걸쳐 계속 공녀를 요구하게 됩니다 .
나중에는 고려여인을 아내로 갖는 것이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일종의 유행처럼 돼서 원 조정에서 요구하는 공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대신들 , 관료 , 장군들이 개인적으로 공녀를 요구하기까지에 이릅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국왕과 왕비가 원나라에 행차할 때
원나라가 요구를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양가의 처녀를 징발해서
공녀를 바치는 경우까지 생겨나 공녀징발로 인한 피해는 실로 크게 됩니다.

때문에 뜻 있는 학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기도 하는데요 ,
그 중에 이것은 고려 말의 유학자 이 곡이 쓴 < 공녀반대 상소문 > 입니다 .

@@@@ 한문 읽기 .
" 공녀의 선발이 시작되면 금혼령이 내려져 온 나라가 소연하고 달아나
개조차 편하지 못하다 .
여아가 태어나면 이웃조차 알지 못하게 하고.....
공녀로 선발되면 혹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메 죽고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많았다. "

당시 고려인들이 공녀로 징발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 참혹한 정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공녀를 이렇게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공녀가 되고 원나라로 끌려가게 된 기씨 ,
그녀는 어떻게 원나라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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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대청도 ( 5 ) 인천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을 가야하는 대청도

#마을 ( 12 ) 고려시대 당시 원나라의 유배지로 쓰였던
대청도 곳곳에는 원나라와 관련된 전설들이 남아 있다 .

#학교( 5 ) 그중 내동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궁궐터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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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 * 어디가 궁궐지라고 ?
- 바로 여깁니다 . 향나무 두그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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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고 (20 ) 현재 학교의 계단도 원래 궁궐 앞에 있던
계단을 이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몇 년전만 해도 궁궐지 주변에서는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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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전체가 장안이라고 , 여기가 대궐터...
대궐이 있는 동네라해서 대궐터 .
장안은 이 전체 부락을 장안이라고 해 .
서울이라는 얘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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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 (14 ) 유배지였던 섬에 궁궐까지 짓고
마을의 이름을 장안이라 불렀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

#기록 ( 16 )
-"원명종의 태자 토곤테무르가 11세의 나이로 유배를 왔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 고려사 > 에 나타난다 .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명종의 태자 토곤 테무르가
충혜왕 원년 ,
그의 나이 11세 때 대청도로 유배를 왔다고 한다 .

#대청도 팬(15)+바다(7)

이곳 대청도에서 일년 여를 머물던 토곤 테무르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
그가 바로 원 순제다 .

< pause >
그런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제는 또 한번
고려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

#차 따르는 여인 이미지( 7 ). 바로 차 따르는 궁녀 기씨와의 만남이었다 .

#책( 13 )
기록에 의하면 순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차 따르는 궁녀 기씨를
매우 총애했다고 했다 .

#책( 20 ) 한낱 차 따르는 궁녀가 이렇게 황제의 사랑을 받자
당시 제 1 황후였던 타나시리는
기씨를 매우 질투했다 .
여러차례 채찍으로 기씨를 때릴 정도였다.

-재연( 8 )
야사의 기록에는
채찍으로 때릴 뿐 아니라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적고 있다 .

#영정 ( 7 )
당시 황후인 타나시리는
순제의 아버지를 죽인 문종의 측근신하 당채시의 딸로
순제는 타나시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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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중앙 민족대 교수 ).
순제 입장에서는 순제는 어려서 고려로 유배도 갔었고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내~~
정치적인 억압이라든가 자기 아버지 죽음에 탄하시리가
관여돼 있었다는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서
타나시리에 대해 애정을 못 느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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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5) 그런데 1335년 , 원 황실에 커다란 정변이 일어난다 .
타나시리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에 대한 모반사건을 일으키고
타나시리 황후도 이 사건에 얽혔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된다 .

-기록 ( 15 ) 그러자 놀랍게도 순제는 궁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할 시도를 한다 .
그러나, 이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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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원의 경우 왕비족은 정해져 있었다 .
비 왕비족이 책봉될 경우,
견제도 있었고 모함과 질시도 있었다 .
그러기 때문에 기 황후는 황후 책봉과정에서
견제를 받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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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사 5층 석탑 가고 ( 6 ).

이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이민족인 기씨가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



# 탑( 22 )
그것에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탑 하나가
제주도에 남아 있다 .

원당사 5층 석탑 ,
이 탑은 아들 낳기를 원하는 기 황후의 청을 들어
원 순제가 세워준 것이라고 한다 .

그리고 1337년 ,
궁녀 기씨는 실제로 아들을 낳는다 .

#환관( 13 )

상황은 궁녀 기씨에게 상당히 유리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
이즈음 , 원 궁중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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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 T 16 치징푸 )
고려인의 한문수준은 뛰어났다.
문자를 알고 역사를 알았다.
이런 이유로 고려인을 환관으로 삼았고
고려환관은 궁중 내부에서 계책을 짜며 지배자의 역활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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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사 환관전 ( 30 )

< 원사 환관전 > 엔 단 두 명의 환관이 입전 돼 있다.
그 중 한 명인 박불화 , 고려출신 환관으로
기 황후의 측근이 되는 그는
기 황후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
이런 고려인 환관들을 비롯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직속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를 막기위해 고려정부까지
기 황후의 황후책봉에 발빠르게 움직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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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그 당시 고려로서는 원나라 내부에서 계속 입성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씨가 황후에 오르면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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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이미지( 14 ). 이 무렵 , 기씨의 황후책봉을 반대하던
세력이 축출되고 ,
1339년 ,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왔던
기자오의 딸은
드디어 원제국의 황후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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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 황후 재연 이미지 .

공녀로 끌려간 기 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사연은
이렇게 드라마틱한 부분이 많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기 황후는 미모가 아주 뛰어나고 총명했을 뿐 아니라
하필 순제는 대청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었고....
게다가 원 궁중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들까지 한몫을 해서
드디어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요 ,

그것은 신분 등급이 엄격한 몽고사회에서
"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는 규칙을 깬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
기 황후는 이후 25년 간 제 2 황후의 자리에 있다가
1365년 제 1 황후가 세상을 뜨자
제 1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요 ,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해 많은 일들을 한 것은
제 2 황후의 자리에 있을 때부터
제 1황후를 젖히고 실권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




자, 이렇게 무려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고려여인이 원나라 황실의 주인으로 머물자
그 영향은 단순히 정치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 토용 .

이것을 한번 보시죠 ?
원 나라의 무덤 속에서 나온 흙 인형 , 즉 토용인데요,
자세히 보면 입고 있는 옷이 위 아래가 떨어져 있는, 우리 식의 치마 저고리입니다 .
몽고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아래위가 나뉜 치마저고리형태의 옷은 입지 않고
아래 위가 하나로 붙은, 그러니까 원피스 형태의 옷이 전통적인 복식이라고 하는데요 ,
원나라의 무덤 속에서 나온 이 토용은
왜 고려 식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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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 몽골로 런 ( 7 ). 현재 몽고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

#박물관 외경( 5 ) 이곳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는
특이한 유물이 보관돼 있다 .

#내부( 9 ) 몽골의 전통적인 유물들을 전시 하는 한켠에
자리잡은 유물 한 점 ,

-인두( 3 ) 그것은 우리 눈에도 꽤 익숙한 인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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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 이것을 뭐라고 부르나 ?
- 일루르 .
발음도 인두와 거의 같았다.
기황후로부터 전해졌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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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
인두는 정말 고려로부터 전해진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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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임영미 ( ??? )

그런 유물이 있었다면 중국 측의 유물은 아니다 .
이 사람은 유목 민족이기 때문에 쇠에 불을 담아
옷을 다려 입는 문화는 없다 .
그 사람들은 기후가 춥기 때문에 짐승의 털가죽같은 것을
주로 입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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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미 교수( 3 ) .
EFFECT...

-몽고 전통 복식( 18 ) 복식 측면에서도 고려가 원에 미친 영향은 적잖다 .
원대 벽화에서 나타나는
몽고의 전통적인 복식을 보면
모든 옷들이 아래위가 하나로 붙은 양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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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임영미 .
남녀 양식이 모두 포 형식의 옷을 입는다 .
거기다 춥기 때문에 반소매, 반비 같은 것을 껴입는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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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복식 ( 6 ) 그런데 원의 후기가 되면
이렇게 전통적인 몽고 복식에 변화가 나타난다 .

#흙인형 ( 20 ) 당시 벽화와 무덤 속 흙인형들은
아래 위가 나뉘어진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다.
특히 윗 저고리의 선이 길게
허리선까지 내려와 있다 .
몽고의 전통 복식이 아닌
이런 옷차림은 어디서 온 것일까 ?

#고려불화속의 옷차림( 14 ).
고려시대 그려진 불화들을 보면
그 의문은 풀리게 된다 .
저고리가 허리선까지 내려오는
치마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 ,
그것은 바로 고려의 복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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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임영미
2부식의 치마 저고리 양식 ,
고려의 저고리양식이 둔분선 길이나 허리길이의
저고리에 치마였기 때문에 그 양식을 입은 사람 수만명이
원으로 가서 황실의 멤버가 되면서 복식에 영향을
끼쳤다 .
이것은 몽골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중국사람들도 이것을 고려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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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사 >책 CG . 고려양에 대한 기록은
원나라의 기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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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 치칭푸 )
고려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상당히 특수한 명사,
고려여성들의 복식을 말한다.
이것은 기황후로 대표되는 고려궁녀들이 들여온 것으로
~~~~ 원나라와 명나라의 시인들이 시를 통해
고려양에 대해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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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벌판 ( 20 ) .
고려양은 비단 복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려의 음악을 비롯해서
생활 풍속 ,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갔다 .

#몽골집( 3 ) 초원에서 생활하는 몽골의 한 전통적인 가정,
이곳을 찾았을 때 이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

#매작과 만드는 과정( 30)
밀가루에 설탕을 넣고
기름으로 튀겨낸다는 뮈시카 ,
전통음식인 '버브'의 한 종류다.
중간에 칼집을 내고 꼬아내는 과정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과 매작과를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다 .

-튀기고( 12 ) 평소에는 이렇게 크게 만들어 먹지만
명절에는 모양을 작고 예쁘게 만든다는 뮈시카,

-우리것( 13 ) 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과 , 매작과도
중간에 칼집을 낸 뒤 칼집을 낸 부분을
뒤로 꼬아서 만든다 .

-비교( 5 ) 이 둘은 왜 이렇게 닮아 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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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최기호 .
매작과라는 것은 신라시대부터의 한과,
기록에 의하면 고려의 여러 음식들이 전해졌다고
고려 병 , 고려 다식 , 고려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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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로 앉아 있고
수많은 고려여인이 원나라로 건너갔던 이 시기 ,
고려의 문화는 " 고려양 " 또는 "고려국양"이란 이름으로
원나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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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 각 황제와 황후의 영정들 .

자 , 이것은 원나라 황제와 황후의 영정들입니다 .
징기스칸이 몽고족을 완전 장악하면서 중국의 통일과업을 시작한 것이 1206년,
그러나 통일이 완성된 것은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때인 1271년입니다.
그러니까 쿠빌라이가 대원제국을 건설한때로부터 본다면
원 제국이 존속한 것은 약 100여년에 불과합니다 .
(영정들 손짓하며)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원제국의 황제외 황후였던 인물은 몇 명이 안되는데요 ,
이 중 기 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실권을 행사한 기간이
30년 정도이니까 대원제국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상당한 기간입니다 .

자, 고려의 공녀로 끌려와 각종의 고난을 헤치고
드디어 황후의 자리에 오른 기 황후 ,
그녀는 과연 어떤 황후였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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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원대 성곽 (13 )+(14). 중국의 수도 베이징 ,
중국 역사상 베이징을 처음 수도로 정한 것은 원이다 .
원은 베이징에 도읍을 정하고 대도라 불렀다 .

그러나, 시민공원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천 미터 정도의 성곽 터를 제외하고
베이징에 원나라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

#자금성 ( 17 )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원나라의 유적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
현재 자금성의 건청문 자리가
옛 원나라 황궁의 본당인 대명전이 있던 자리 ,

#호성하 ( 12 ) 명은 옛 원의 황궁 자리에 새롭게 궁을 건설하면서
황궁의 보호를 위해 황궁 주변의 흙을 파내어
하천으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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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황궁터중 연춘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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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공원 그렇게 파낸 흙을 연춘각에 매립하여 만들어진
인공 산이 지금의 경산이다 .

#호수 - 중남해 지구 ( 18 )
원나라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원의 흔적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
중국 고위관료들의 거주지인 중남해지구,
원래 이곳은 기황후의 거처인 흥성궁 자리였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 원 궁궐도 ( 9 )+복원줌인(6)

기 황후가 제 2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1339년 ,
황후에 오른 뒤 기황후는
주로 흥성궁에 살았다 .

# 복원 내부 ( 21 )
( 카메라 도는 것 보다가 )

-내부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의 새 주인이 된 기황후는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매우 똑똑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

#기록 - 여효경 (34 )

시간이 나면 <여효경>과 < 사서>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은 먼저 태묘에 제사지낸 뒤 먹었다고
< 원사 후비 열전 > 은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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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순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
어떻게 하면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고민 ,
재상들을 적재적소에 앉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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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 TR (10). 북경 시내에는 기 황후의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엿볼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다.

-노구교( 10 ). 원나라 말년 대규모의 기근이 들어
대도안에서만 20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시체가 나뒹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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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황유복 .
기황후의 자금내원인 자정원에서 기황후의 명으로 돈을
내어 시체들을 운반해서 경도 11문밖에 묻었다 .
땅에서 물이 날 정도로 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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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10 ) 뿐만 아니라 기 황후는
대규모의 구호사업도 함께 펼친다.
정치의 전면에 나선 기황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

#궁터( 9 ) 막대한 재정이 드는
이런 사업을 기황후가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정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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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원래 이름은 휘정원 , 기 황후가 황후로 책봉이 되면서
자정원으로 바꿔....기 황후의 친위세력인 환관세력들이
자정원을 장악.....
인력과 물적 자원들을 자정원에서 장악 .
자정원이 중요한 권력 투쟁의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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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사 >- 환관이름 ( 12 ) 기 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뒷받침이 되는
자정원에 고려인 환관들을 집중 배치한다 .
뿐만 아니라 순제로 하여금 박불화에게는
영록 대부의 벼슬을 내리기까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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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박불화는 이품 영록 대부에 제수가 되는데
원대 제상가운데 영록 대부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
환관출신으로 여기 임명됐다는 것은
그만큼 기 황후 세력이 셌다는 것을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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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터( 12 ) 기 황후의 권력이 이렇게 강해지자
황궁내에는 자정원파가 생겨나고
이는 황제의 측근들과 대립하기에 이른다 .
그러나, 이즈음 순제는 방탕한 생활에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
(이어서)
#모의 ( 6 ) 그러자 , 기황후를 중심으로 한 자정원파는
중대한 계획을 세운다.

#기록 ( 25 ) 이른바 순제 양위사건이 그것이다 .

( 잠시 보고.... )
고려인 환관 박불화가 앞장 서서
황제인 순제에게 왕위를
장성한 황태자에게 넘길 것을 요구한 것이다 .
일종의 쿠데타 모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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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순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드디어 황제의 권력을 아들게에 이양시킬
결단을 내린다 .
그 과정을 보면 자기 자신의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겠지만 ,
기 황후로서는 원 사회의 동요되는 정치 권력을
안정 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했던 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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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 황후 ( 13 )
순제의 반발로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순제편에 서서 기황후의 모의를 거부했던
재상만이 귀양가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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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

# 뒤에 초원 배경 .... 광활한 ...

자기의 남편이자 원나라의 황제인 순제의 양위까지 도모를 한다....
당시 기 황후의 힘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
그런데, 한 나라에서 황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황후가 이렇게 많은 활약을 한다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
사실 이즈음 원 제국은 이미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돼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

# 원 지도 - 곳곳에 일어난 반란표시 ( 움직이는 횃불 ) .

자, 이것이 원 말기 반란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지역들입니다 .
양자강 유역을 비롯해 강남 , 황하 유역등 반란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됐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 황하유역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입니다 .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렀다해서 이름 붙혀진 홍건적,
홍건적은 몽고인들이 가장 멸시했던 한족들로 구성이 돼서
결국 원을 멸망시키는 주요한 세력이 되는데요,
원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이 홍건적에 속해 있었습니다.
황하유역에서 일어나 강남의 거점인 남경을 점령한 주원장은
이어 군대를 이끌고 무서운 속도로 원의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순제와 기 황후는
북경을 버리고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요 ,
황급히 수도를 버리고 도피 길에 오른 순제와 기황후 ,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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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

# 차런 ( 4 )

# 연천 ( 24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
이곳에 기 황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 있다 .
지금은 밭으로 변해 버린 조그마한 야산....
황후가 죽은 300여 년 뒤 만들어진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이곳에 기황후의 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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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 ...
묘의 위치가 요 정도 ~~~ 할아버지들이 묘 자리다 .
한 바퀴 돌아 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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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12 ) ( pause )

고려양식의 어골무늬 기와도 많이 발견이 되고 있는데
묘를 둘러쌌던 곡담의 기와라는 것이다.

# 풀샷 ( 11 )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 황후 ,
그녀의 최후가 어땠길래
원이 아닌 국내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것일까 ?

#차 런( 4 )

#도서관( 13 )
취재진은 기 황후의 최후에 관한 기록을 찾기 위해
베이징 도서관을 찾았다 .

-( 10 )사서
EFFECT....

여러 곳을 수소문 한 끝에
사서는 기 황후에 관한 책 한 권이
희귀본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

-희귀본 실( 13 ) 베이징 도서관 희귀본 실 ,

이곳에서 우리는 기 황후와 원 순제의 최후에 대해
적고 있는 책 < 북순사기 > 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신하 유길이 도피하는 원 순제를 수행하며
17 개월 동안 쓴 책이다 .

-투 샷 앉아 있고 ( 11 ) EFFECT.... 잠시 .

< 북순사기 > 에 의하면
원 순제와 황후 , 황태자 일행이 대도를 떠난 것은
1368년 7월 ,

# 도피행로 ( 20 )

도피행로는 상도, 응창을 거쳐
초원으로 이어진다 .
도피를 하는 중 , 기 황후는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

-카라코롬(18) 1년 6개월의 도피 끝에
몽고의 깊숙한 초원,
카라코롬에 이르러 순제는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이양한 뒤 세상을 떠난다 .

#초원 ( 8 )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다리 황태자는
북원의 황태자가 되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기 황후 기록( 10 )
원나라가 망한 6개월 후 ,
명나라에 의해 씌워진 < 원사 >
이곳에 기황후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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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치칭푸 .
원나라와 고려사는 모두 기 황후에 대해 부정적 ,
두 가지 공통점은 전부 봉건적인 유학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
기 황후는 여성, 여성의 정치 참여는
유학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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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검색 - 기철 ( 20 )

기 황후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기록된 데는
기 황후의 오빠 기철도 한몫을 한다 .
원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기철은
고려 내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많은 횡포를 부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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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 기철의 악행 ?
대표적인 예로 충목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기도 했고
또 각지에 농장을 개설해서 수탈 ,
충혜왕이 체포되어 원에 연행될 때 기철이 앞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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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13). 결국 기철은 원나라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후기,
원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공민왕에 의해 처형 당한다 .

#재연 ( 11 )
기 황후도 고려의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 개입해
자신이 부리기 쉬운 사람을 세우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일들을 자행하기도 한다 .

#기록-공녀 징발 금지( 15 ).
그러나 , 긍정적인 면들도 없지 않다 .
충렬왕 이후 80여년 간 계속되던 공녀의 징발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것도 바로 순제때 다 .


#고려궁터 ( 17 )

뿐만 아니라 원 내부에서 종종 제기되던 입성론,
즉, 국호를 비롯해
고려에 대해 어느 정도 부여한 자주성을 인정하지말고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도 원 순제 때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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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장동익 .
* 기황후가 국내정세에 미친 영향 ?
고려를 원에 직활지로 편입할려고 했던 입성론이
영원히 폐지 되었다든가 그 자신이 끌려 갔던 공녀나
환관의 불법적인 징발이 축소....
원의 정치적 간섭이나 경제적 수탈이 축소...
이러한 양상들은 고려정부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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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씨 제각 ( 7 )

지난 8월 ,
행주 기씨 제각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

#영정 ( 10 ) 기 황후 영정의 봉안식 이었다 .

# 봉안식(20) 사실 그동안은 기씨 집안에서조차
기 황후의 부정적인 평가에 밀려
자신의 선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했다 .
기황후 사후 600여년만의 영정 봉안식
기씨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대륙으로 끌려갔던
13살의 고려여인 기씨는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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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김성남 .
개인의 삶 , 그가 어린 나이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과연 그가 고려의 입장에서 일을 할수 있었을까?
그가 원의 입장에서 원의 황후로 일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고려와의 관계에서 미묘한 갈등,
고려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인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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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 18 )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원으로 끌려가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기 황후 ,
그에 대한 평가는
암울했던 고려후기의 역사 한가운데 놓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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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후기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자랑스럽게 내어 보일만한 역사는 아닙니다 .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한가운데 서 있는 기 황후 ,
그러나, 한 개인으로 보자면 기 황후는
공녀로 끌려가 한 나라의 황후가 되기까지 ,
나라가 힘이 없고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여인입니다.
물론 , 그의 행동이 비단 개인적인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몽고와 고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기 황후의 삶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

그렇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지금까지는 기 황후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모습들만이 부각돼 왔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기 황후가 속한 당시의 시대가 우리에게
자랑스럽지 못한 시대라는 것도 상당한 이유가 될텐데요 ,
이제 우리는 기 황후를 좀 더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
그것은 비단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서 뿐만 아니라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역사속에서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200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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