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구씨의 기가와 기가관련 성씨 시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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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의사 강경구님이 잡지 의학동인(醫學同人) 1988년 1월호에 실린글을 다른 호에 실린 글들과 함께 모아서 [1991년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란 이름으로 펴낸 책에서 우리 가문과 관련된 내용을 뽑은 것이다.
내용이 다소 어렵고 족보에 나오는 우리 가문의 공식 입장과도 다른 것이 있고 나와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해설을 첨부하여 글을 올립니다. 의견이 다른 것이나 질문이 있으면 같이 의논해서 우리의 공식 입장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93세손 기회근
첫번째 문제는 기자조선의 수도의 문제이다, 우리 1982년판 족보 원편 16쪽에는 사기 및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기자…도읍을 왕검성 평양에 정하고 …> 라고 하여 수도가 평양에 있었고 따라서 준왕이 위만에 밀려난 곳이 평양이고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착한 곳도 또한 사기와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금마군 지금의 익산군에 피거…>라고 하여 전북 익산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오히려 출발한 평양이 도착지로 나오니 처음 읽는 사람은 헷갈리게 된다. 나는 강경구씨설 을 따른다, 이것은 강경구씨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고 원래 기자조선(고조선)의 수도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않은 문제이다, 이것은 크게 세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주지역에 있었다는 설과 둘째로 만주지역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평양에 있었다는 설이다. 우리 족보와 다수설은 세번째 설을 따른다, 강경구씨와 나는 첫번째 설을 따른 것이라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래된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고려시대에 지은 책들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다,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고조선의 수도는 당연히 한반도 내에서만 존재하여야 한다, 지금 이북에서 평양만이 고조선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래야 고조선을 이은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후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한반도 내로 조선의 역사를 축소 하려는 의도와 맞아 떨어져 아직 까지도 다수설은 평양만을 고조선의 수도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지나의 고대 책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한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 바다의 북쪽, 큰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동해의 안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말하기를 조선이라 한다]
이 우수광수런 보물찾기 같은 설명을 강경구씨의 설명을 따라 풀어보면, 열양은 열수 지역에 있는 지명이며 열수는 지금 난하의 지류이다, 따라서 조선은 열양의 동쪽, 즉 열수의 동쪽에 있다. 다음으로 바다의 북쪽에 있는데 그것도 바다의 동쪽과 북쪽 모서리에 있다고 했다, 지나사람들이 말하는 동쪽 바다는 우리의 서해로 황해를 말한다. 북쪽 바다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이은 안쪽, 즉 발해만을 말한다. 조선은 그 당시 발해만의 북쪽 모퉁이에 있다는 것이 된다. 이곳은 요하강 하구주변이 된다. 그러면 큰산의 남쪽을 찾으면 발해만의 북쪽 해안에서 유명한 큰산은 의무려산이 유명하다. 정리하면 조선은 발해만의 북동모퉁이, 발해만의 북쪽해안, 의무려산의 남쪽이라면 지금의 요서 북진지방으로 요하와 난하사이 근처이다. 그러니까 처음 기(箕)자 명문이 나오는 고죽국 지역의 기국(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기자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서방의 2천여리(그 당시의 척도로)를 빼앗기고 요하근처로 옮긴 기자조선이 이때 다시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 난하나 요하하구 또는 요동반도 어디에선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남포근처에 상륙하여 평양에 들어간 것으로 된다. 우리 문중의 공식 입장(족보상으로는)은 그러나 평양에서 밀려 익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강경구씨는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무제에게 망하자 그 유민이 평양으로 밀려왔다가 평양마한이 다시 망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다시 옮긴 것으로 설명하고있다. 마한이 위만조선의 유민인 진한세력에 밀린 것은 사실로 본다, 그러나 강화도로 옮겼다는 것은 의문이다. 후한서에는 준후절멸(準後絶滅) 마한자립위진왕(馬韓自立爲辰王)이라고 해서 준의 후손이 끈어진 후에 마한이 스스로 진왕을 세웠다고 했는데 이 것은 위만조선의 유민들인 변한인들에게 평양마한이 망하여 평양지방에 준왕의 왕가는 남으로 내려가고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평양마한지역에 왕이 되지 못했다고 본다, 대신 그 지역에 남은 주민들이 스스로 준왕 후예가 아닌 사람으로 왕을 삼았다는 뜻으로 본다. 강경구씨는 이를 낙랑세력으로 보았다. 남쪽으로 쫒겨 내려간 준왕의 후예는 다시 준왕 처럼 배를 타고 서해안 강화도로 내려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상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평양에서 남으로 내려올 때는 곽창권님이 [한국고대사의 구성] 책에서 지적한대로 황해도에 있는 자비령 고개만 넘으면 거의 평지를 바다보다 더 쉽게 내려올 수 있는데 해양족도 아닌 고대인들이 많은 무리를 지어 배를 타고 내려온다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듯이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이 없다, 그러므로 육로로 이동하면서 강화도를 거쳐가면서 강경구씨 설명대로 단군과 연관된 전설은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온조왕에게 멸망할 때 마한의 위치는 강화도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의 기록에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수도를 옮긴 것을 보고하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니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으로는 웅천(熊川), 서로는 대해(大海), 동으로는 주양(走壤)을 한계로 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온조왕시대에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 근처다. 이곳에서 강화도나 김포는 서쪽이지 남쪽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남쪽 경계라는 웅천을 김포로 가정하여 이곳에 책(울타리)을 세운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최후까지 저항한 원산성과 금현성을 강화도 안의 어느곳으로 지적까지하고 있다. 백제의 북과 남 그리고 동쪽 경계는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서쪽은 확실하다, 대해라고 되어 있으니까, 바다이다, 바다. 그렇다면 강화도도 이미 백제 땅인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다. 한순근님은 웅천을 지금의 안성천으로 금현성을 금산 지역으로 설명하고 있고 당시의 마한 수도를 천안으로 가정하고 있다. 곽창권님은 천안 옆에 있는 직산이나 익산설을 소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서울에서 강화가 더 오지인가 아니면 행주가 더 오지인가? 내가 만약 최후까지 저항한 믿기 어려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격리한다면 같은 조건일 때 행주산성부근 보다는 강화도가 반란을 일으켜도 섬이라 고립시켜 진압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강화에서 행주로 옮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에 영창대군이 유배되었다가 죽은 곳도 강화도고 광해군도 처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었다. 정확한 위치는 더 연구가 필요 하겠지만 단언컨데 강화도는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강경구님은 마한이 망한 장소를 강화도로 보면서 유민을 행주지방으로 옮긴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소개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온조왕 27년 여름 4월 기록에 <원산 금현의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의 이북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라고 해서 온조왕 27년 서기로 9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한이 완전히 망한해를 삼국사기는 서기 9년으로 앞 가록에서 확실히 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서기 10년으로 특별한 설명없이 고집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가끔 착각한 듯하다. 각성의 시조 이름에 대하여도 기자급친이 후세에 판각 잘못으로 우친으로 보고 우자돌림으로 이름들을 만들어 우량, 우경, 우성, 우평 등등 각 성씨의 세보마다 통일성없이 이랫다 저랫다 했다고 했지만 우리 기가족보 원편 17쪽에는 처음 숭인전비를 따라서 기씨는 평(平), 한씨는 친(親), 선우씨는 량(諒)으로 기록되있어 이를 따르다가 위지의 기록대로 우성을 따른다 하고 한씨족보도 역시 그렇다 했으며 송구하나 숭인전비가 잘못되었다 했지 우성이다가 우량이다가 우경이다가 우평이다가 필요한대로 시조이름을 사용한적이 없다. 우리 조상님이 마치 역사 조작꾼으로 설명한 것은 기분 나쁘다. 강경구님은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우리 기가에 대한 내용은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 인가가 큰 문제일뿐 그 역사의 흐름에는 동의 하며 큰 다른 의견은 없다. 사실 우리 기가의 역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리라고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점을 알려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한씨의 경우에 강경구님은 평양마한이 망한 이후에 평야에 남아 고구려의 신하가 된 것으로 설명했지만 한씨의 족보에는 백제에 마한이 망한 이후에 신라에 귀의하여 신라에서 벼슬하고 살아온 것으로 나온다. 한씨들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선우씨는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이 곤란하다. 그러나 숭인전비와 위지의 기록엔 선우, 한, 기씨가 한형제로 나오고 각 성씨가 그를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같은 기자의 후손이기는 해도 중간 중간 각성으로 분화된 것으로 나오니 이것도 문제이다. 인천이씨는 경원이씨나 인주이씨라고도 하느데 이씨의 홈피에 가보면 허기나 이허겸등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이 나오기는 해도 기가와의 연관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있다. 이씨들은 기가와의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않는데 우리만 그들을 동족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단지 시조부터 중시조사이의 900여년 사이에 기가의 씨족분화를 가정할 수 있는데 흥미가 있을 뿐이다. 참고용으로 읽기 바랍니다. 이씨가 기가와 허씨 사이에서 마치 박쥐 같은 씨족으로 묘사된 것을 알면 기분이 나쁠텐데 이를 받아들이려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에 기준왕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성씨로 서씨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가의 기록들을 찾아 올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강경구의 한, 기, 선우씨 시조설
서기 194년 패수를 지키던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공격하였을 때 준왕은 역부족하여 도망치게 되었다. 이 때 준왕은 혼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좌우의 궁인 수천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당시의 마한은 도읍지를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이 고려시대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이라고 되어 있다. 평양 지방이 마한이라는 것은 최치원이 명확히 언급했는데 평양지방에 있던 마한의 도읍에 있는 마읍산의 명칭을 보거나, 이승휴가 마한 왕검성을 평양이라고 한 것을 보거나 후한서에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였다고 한 정황 증거로 보거나 국내외의 문헌이 일치되어 있다, 국내의 규원사화나 단기고사, 환단고기등의 도가 사서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평양지방에 마한 또는 막조선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사서들의 심빙성에 대해 계속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상황이므로 그 인용은 보류하기로 한다.
이 평양 마한 지방에 준왕이 도래하여 마한을 공격 파멸시키고 새로운 왕조 즉 한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만한 정도의 국가 건설 작업을 했다면 준왕이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명을 거느리고 마한을 공격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 후한서의 기록이 위지의 기록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준왕의 남하는 해로에 의한 것 이었다고 하는데 그 경로는 난하 하구에서 출발하여 요동 반도 끝의 강상 지방을 경유하여 평양 지방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 내에 처음으로 기자족의 뿌리가 내려지게 된다. 이 때 평양지방을 정복한 기자족은 위세가 참으로 대단해서 기존의 마한왕조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조가 낙랑국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도 수세기 동안 준왕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기준 왕조는 서기전 194년에 성립되어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하자 그유민들인 진번세력에게 패망하여 남하할 때 까지 100여년 동안 영화를 누렸다. 이 동안에 당시 한을 구성하고 있던 맥족과 하층부의 예족 사이에 상당히 광범위 하게 기자 숭배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평양지방의 기자 숭배 신앙은 그 후로도 천년, 2천년을 두고 우리민족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평양을 도읍으로 한 고구려가 그후에 태양숭배의 일신, 시조숭배의 가한신과 함께 기자신을 숭배하고 그보다 또 수백년이 지난 고려 숙종 때 평양에 기자묘를 세우고 사당을 두어 기자를 숭배하고 더 나아가서 조선왕조에 와서는 문화 개명의 신으로 기자를 조선왕조의 정신적 전통으로 숭배한 것 들은 모두 기자 숭배의 뿌리 깊은 맥락이라고 하 것이다. 이 기자숭배의 전통은 서기전 100년경에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족에 의해 성립되어 전승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기준의 세력이 남하해 버린 뒤에도 반도 북부의 예족들은 기준 내지 기자 신앙을 계속 간직하였다, 그 결과 중국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족열전에 준왕의 기록이 실리게 되었다. 기자와 기준에 대한 기록이 위지 예족전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삼국지 편찬 당시까지도 평양 지방에는 준왕의 씨족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도 이 준왕계 씨족과 기자를 숭배하는 예족 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널리 번성하여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로는 기자 신앙이 고구려의 주요 지도 계급인 예족의 신앙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국신 신앙으로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잠시 민속 신앙의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예를 자칭하고 일어선 고려에 와서는 다시 국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되고 조선에 와서는 더욱 번창하여 마침내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선우씨를 택하여 기자릉의 참봉과 사당의 전적을 대대로 맡아 가도록까지 국가에서 배려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서기전 194년 평양의 마한을 공파하고 한을 세운 기준왕조는 그 뒤로 왕검성지방,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기준 집단이 평양지방에 가지고 온 문화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반도 내에서의 본격적인 철기 문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때 강성함을 자랑하던 기준왕조도 100여년이 지나면서 북쪽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는 새로운 유이민 집단 때문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전 108년과 107년에 걸쳐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자 이민족의 통치를 피하여 진번 등 위만 조선의 여러 제후국들이 속속 동남 지방인 한반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84년 마침내 이 기준정권 내에서 정변이 생겼다. 어윤적의 동사연표는 이것을 [왕이 진변의 난리를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평양을 습격한 것은 진변(혹은 진번, 진한)이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정작 진변은 평양에 정착하지 않고 더욱 남하하여 한강을 가로 질러 낙동강 유역에 분포 정착하게 된다. 이 평양 지방에는 잠깐 권력의 진공 상태가 있었는데 그것을 메꾼 것이 바로 진번과 같이 위만 조선에서 내려온 낙랑 세력이 었다고 추측된다. 진변의 침공에 무너진 기준계 왕실의 말로는 처음 요서의 난하 하류에서 망명할 때 해로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평양에서 또다시 망명해 나가는 데에도 해로를 이용하였던 것 같다. 동사연표에는 준왕계가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갔다고 되어 있으나 이 지리산은 지리산(地理山) 또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고유의 원래이름이 두루뫼, 두루모리 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름의 산이라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어서 꼭 지리산(智異山)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평양 지방에서 해로로 남하한 준왕계가 다시 정착한 곳은 어디일까? 우선 생각할수 있는 것은 당연히 서해안 어느 곳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로 한강 이남의 지방에는 평양에서 준왕에 쫓겨난 마한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준왕계가 또 마한을 공파 했으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억설이 되기 쉽고 그러한 아무런 역사상 문헌상 소전이 없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서기 9년 기준계의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백제의 기반이 되는 한강 유역 근처에 자리잡았다고 보아 크게 틀림이 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점을 고랴하면 기준계의 마한이 남하하여 자리잡은 곳은 지금의 강화도가 거의 틀림이 없다.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삼랑산성(三郞山城)이 정족산(鼎足山)에 남아 있어 유명한데 이 삼랑산을 풀어 보면 세(三)+돌(郞)+뫼(山) 가 되고 정족산을 풀이하면 솥(鼎)+다리(足)+뫼(山) 가 되어서 삼랑산, 즉 세돌이뫼는 정족산, 즉 솥다리뫼가 되어 결국은 세돌이나 솥다리나 같은 말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세 나 솥은 일종의 접두어이므로 그것을 빼면 돌이뫼 다리뫼 가 되어 동사연표의 두루뫼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동사연표에 나오는 지리산 두류산은 지금의 강화도 정족산이라고 추정하며 이 정족산 옆에 단군이 제사를 드렸다는 마니산참성단(摩尼山塹星壇)이 있는 것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도 기준계의 왕실이 강화도에 왔을 때 북방의 정통 왕조인 단국(檀國)의 왕족이라고 즉 단군이라고 자칭하였던 것 같으며 그 결과 이 마니산 참성단이나 정족산 삼랑산성이 단군과 관계 있는 듯이 전해 내려온다고 본다.
이번에는 정통적으로 기자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우는 한씨 기씨 선우씨를 살펴보자. 우선 한씨는 준왕이 마한을 공격하고 지금의 평양 지방에 도읍하면서 한왕이라고 자칭한데서 비롯한다. 그 후에 기자조선에 남은 그의 자제와 친척들이 한씨라고 자칭하였다고 위략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망명한 준왕 및 그 직계 비속들도 한씨라고 칭하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 된다. 한씨 성이 물론 이 준왕 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천왕이 서기전 9세기경 한씨라고 자칭한 뒤 기자국의 끝 왕인 준왕이 해로로 평양 지방으로 망명한 뒤 한씨의 대종이 평양지방의 한씨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평양의 한씨 마한 세력은 백여년 동안 매우 강성하여 현지의 예족 주민들로부터 고조선 천왕의 칭호인 단군의 신분과 호칭을 증정받기까지 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단군으로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준왕의 후예들이 강화도에 망명하였을 때 현지의 주민들이 그들을 단군이라고 숭배하여 그들의 족적인 삼랑산성이나 마니산참성단 등이 단군의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 등에서 그렇게 추측된다, 좀더 생각하면 고조선의 3대 제후국인 변한 진한 마한의 가간이 모두 단군이라고 자칭한 듯 하다(신채호, 정인보 선생설). 그런데 진변의 침략으로 망명한 것은 한왕 세력의 전부가 아니었다.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강화도의 마한 세력이 크게 떨치지 못하고 서기 9년 신흥의 백제 세력에 멸망당한 것이라든지 평양지방에 그 후로도 계속 한씨의 강성한 방자취가 나타나 있음을 볼 때 그렇게 본다.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낙랑의 유적이나 유물 가운데 한씨의 성을 명기한 것이 많은 것은 한씨가 당시 낙랑의 주요한 집권 세력에 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씨의 주류 세력이 평양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고 강화도로 망명한 집단은 그다지 대규모의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양지방의 한씨는 낙랑이 멸망하고 그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된 뒤에도 왕씨와 함께 재지호족으로서 고구려에 종사하였다. 불행하게도 고구려 시대의 한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않는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한씨 세력은 안승을 따라 남하하여 익산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이것이 익산 지방의 토성으로 나타나는 한씨의 기원이다. 대문 실복(大文 悉伏)의 난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 옮겨져 흩어질 때 한씨는 지금의 청주 지방인 서원경에 대대적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결과 익산 한씨는 극히 일부만 익산에 남고 대부분은 청주 지방에 옮겨져서 한씨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판명해 두어야 할 것은 한씨, 기씨, 선우씨의 시조라고 전해 오는 우친(友親), 우성(友誠), 우량(友諒), 우평(友平) 등의 이름이다. 이는 이 우(友)자 돌림의 이름들은 위략의 중세 어느 판본에 기자급친(其子及親;그 아들과 친척들)이 기자우친(其子友親)으로 즉 급(及)자가 우(友)자로 잘못 판각(板刻)되어 그 아들 이름이 우친(友親)인 듯이 전해지게 되었고 다른 이름들은 우(友)자 돌림을 넣어 후세에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각 세보마다 시조를 우친이라고도 하고 우량이라고도 하고 우성이라고도 하고 우평이라고도 하여 통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 한씨의 경우 평양 지방에서 번성하다가 고구려 멸망 후 익산, 청주 등지로 남하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 기씨의 경우를 살펴보면 좀더 다른 행적을 보게 된다. 기씨는 본관인 행주의 위치로 보나 기준계 마한의 역사적 지리적 행적으로 보나 초기 백제사와 마한의 접촉으로 보나 다름 아닌 강화도 마한의 후예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강화도로 남하한 기준계 마한의 후예가 서기 9년 초기 백제에 병합되는데 이 강화도 마한의 후예가 바로 행주 기씨라는 것이다. 온조왕 즉위 4년 만에 온조왕의 한성 세력은 강화도 마한의 정벌에 착수하여 지금의 김포(金浦)에 웅천책(熊川柵)을 세운다, 그리고 서기 9년 마침내 강화도 정족산의 삼랑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마한의 잔여 세력들은 원산성(圓山城; 豆無達城)과 금현성(錦峴城)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그 다음 해에야 완전히 평정된다. 이 두무달(豆無達)은 강화 하음현(河陰縣; 옛 동음내(冬音奈))에 비정되고 금현(錦峴)은 진강(鎭江)의 대모성(大母城)에 비정되어 둘 다 강화도 내의 지역으로 생각된다. 온조왕은 서기 10년 강화도의 마한을 완전히 평정하고 마한 왕족 즉 기준왕의 후예들을 지금의 행주 지방으로 옮겼다고 생각된다. 행주기씨세보(幸州奇氏世譜)에 기씨가 백제의 온조왕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읽어야 비로소 참된 역사적 사실로서 재평가 받을 수 있게 된다.
준왕의 후예가 행주 지방으로 옮겨져 준왕에 대한 제사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지 위지 한전에 [준왕의 후예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한인(韓人) 중에는 지금도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기씨가 강화도로부터 행주 지방으로 옮겨진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세론적으로 보아 온조왕 때를 벗어날 수 없을 것 이며 그섯도 왕전히 멸망당한 서기 10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서기 10년경 행주지방에 옮겨진 기씨 집단이 그후 2000여년을 같은 지역에서 지내 오면서 언제 기(奇)라는 성씨를 정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백제 시대의 일이 틀림없다.
그 다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선우씨이다, 선우씨는 1930년 일제하 국세 조사 당시 80% 이상이 평안 남북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선우씨의 경우 다른 성씨와 달리 그들의 본관인 용강(龍岡)지방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 곳에서 성장해 왔다, 다시말해서 선우씨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남하하거나 북상하지 않고 본거지에 토착하여 자치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본관인 태원(太原)을 중보문헌비고에서는 충주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으나 이미 천관우 선생의 지적한 바와 같이 충주 지방에는 태원이라는 지명이 없고 태원은 지나의 산서성(山西省)의 지명으로서 기자족(箕子族)의 원주지였던 곳의 지명이다. 임승국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전국 시대 중산국왕(中山國王)의 성씨가 선우(鮮虞)씨로서 기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우씨(鮮虞氏)가 선우씨(鮮于氏)임에 틀림없다면 선우씨의 기원을 멀리는 기자에게서 찾게 되거니와 그 사이에 중산국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하겠다. 선우씨의 세보에 준왕의 후예라고 하였으나 이와 같이 중산국의 후예임이 밝혀진 까닭에 증보문헌비고의 성씨조 총목에 기록된 것처럼 기자의 방계(기준의 방계를 잘못 쓴 듯하다) 지파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세보에 선우씨가 용강의 황룡국(黃龍國)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우씨가 고구려 시대 이래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용강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믿을 만한 가승이라고 생각된다. 황룡국은 고구려 초기에 서요하 유역에 인접하고 있던 소국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에 흡수되었고 그 지배층은 고구려의 상층부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 황룡국 세력이 용강 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남하한 이후이다.
따라서 선우씨 세력은 은나라의 기자국 후예로서 태원 지방에 있던 중산국에 일차 집결하였다가 진한 때에 서요하로 이동하여 황룡국을 건설하였고 고구려의 발흥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상층 지도부를 구성했다고 생각된다.
인주(인천, 경원) 이씨를 보자.
인주 이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는 이허겸(李許謙)인데 그 아버지는 준(浚)이었다고 하며 본래의 성은 기(奇)씨 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허겸의 조상 중에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성(李姓)을 처음 사성(賜姓)받은 시조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보 전승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신리 시대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연달아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왕명으로는 경명왕(景明王) 승영(昇英)을 일명 김박영(金朴英)이라고도 한 것이 눈에 띄며 그 밖에 개인 이름으로는 김양박(金梁博), 김장렴(金張廉) 등이 있다, 따라서 세보에 전하는 허기(許奇)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성 허와 어머니의 성 기를 연달아 붙여서 만든 가공적 인물이 아니가 생각된다, 김해 김씨와 허씨가 갈라지고 허씨에서 인주이씨가 갈라져 나간 뒤로도 아버지성 이와 어머니성 허를 연달아 말해서 시조의 이름이 이허겸인 것에서도 짐작된다, 일단 증보문헌비고에 실려 있는 대로 본성이 기(奇)라는 소전을 더 신뢰한다고 할 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세보에 나오는 허기라는 이름은 가공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공적인 이름이 그나마 한 가닥 암시해 주는 것이 있다면 조작적인 이름에 기(奇)자를 넣음으로서 인주 이씨의 본성이 기씨이었다는 방증을 남긴 것이라 할 수있다.
이 인주 이씨의 씨족은 덕양 기씨의 한 지파(支派)였는데 기씨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한씨 선우씨 등과 함께 기자조선의 끝왕인 기준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인주지방에 기성의 분파가 정착한 것은 행주와 인천의 가까운 지리상으로 보아 사리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나 정작 그 시기에 애해서는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인주 기씨가 당나라의 황실성인 이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이 씨족이 크게 융성하였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족적기반(族的基盤)이 형성되기까지는 몇 세기의 세월이 걸렸으리라는 점,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에 오면 벌써 각 지방에 씨족 분화와 함께 호족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기씨 일파의 인주 정착 분화는 이미 삼국 시대의 일 즉 서기 6~7세기경의 일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전통 깊은 지방세력과 중앙에서 세력을 잃은 가락 허씨의 결합에서 인주이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며 이 인주 이씨는 시대에 따라 그 조상 설화 중에 허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기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002-01-09
내용이 다소 어렵고 족보에 나오는 우리 가문의 공식 입장과도 다른 것이 있고 나와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해설을 첨부하여 글을 올립니다. 의견이 다른 것이나 질문이 있으면 같이 의논해서 우리의 공식 입장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93세손 기회근
첫번째 문제는 기자조선의 수도의 문제이다, 우리 1982년판 족보 원편 16쪽에는 사기 및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기자…도읍을 왕검성 평양에 정하고 …> 라고 하여 수도가 평양에 있었고 따라서 준왕이 위만에 밀려난 곳이 평양이고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착한 곳도 또한 사기와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금마군 지금의 익산군에 피거…>라고 하여 전북 익산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오히려 출발한 평양이 도착지로 나오니 처음 읽는 사람은 헷갈리게 된다. 나는 강경구씨설 을 따른다, 이것은 강경구씨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고 원래 기자조선(고조선)의 수도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않은 문제이다, 이것은 크게 세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주지역에 있었다는 설과 둘째로 만주지역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평양에 있었다는 설이다. 우리 족보와 다수설은 세번째 설을 따른다, 강경구씨와 나는 첫번째 설을 따른 것이라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래된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고려시대에 지은 책들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다,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고조선의 수도는 당연히 한반도 내에서만 존재하여야 한다, 지금 이북에서 평양만이 고조선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래야 고조선을 이은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후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한반도 내로 조선의 역사를 축소 하려는 의도와 맞아 떨어져 아직 까지도 다수설은 평양만을 고조선의 수도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지나의 고대 책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한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 바다의 북쪽, 큰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동해의 안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말하기를 조선이라 한다]
이 우수광수런 보물찾기 같은 설명을 강경구씨의 설명을 따라 풀어보면, 열양은 열수 지역에 있는 지명이며 열수는 지금 난하의 지류이다, 따라서 조선은 열양의 동쪽, 즉 열수의 동쪽에 있다. 다음으로 바다의 북쪽에 있는데 그것도 바다의 동쪽과 북쪽 모서리에 있다고 했다, 지나사람들이 말하는 동쪽 바다는 우리의 서해로 황해를 말한다. 북쪽 바다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이은 안쪽, 즉 발해만을 말한다. 조선은 그 당시 발해만의 북쪽 모퉁이에 있다는 것이 된다. 이곳은 요하강 하구주변이 된다. 그러면 큰산의 남쪽을 찾으면 발해만의 북쪽 해안에서 유명한 큰산은 의무려산이 유명하다. 정리하면 조선은 발해만의 북동모퉁이, 발해만의 북쪽해안, 의무려산의 남쪽이라면 지금의 요서 북진지방으로 요하와 난하사이 근처이다. 그러니까 처음 기(箕)자 명문이 나오는 고죽국 지역의 기국(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기자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서방의 2천여리(그 당시의 척도로)를 빼앗기고 요하근처로 옮긴 기자조선이 이때 다시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 난하나 요하하구 또는 요동반도 어디에선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남포근처에 상륙하여 평양에 들어간 것으로 된다. 우리 문중의 공식 입장(족보상으로는)은 그러나 평양에서 밀려 익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강경구씨는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무제에게 망하자 그 유민이 평양으로 밀려왔다가 평양마한이 다시 망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다시 옮긴 것으로 설명하고있다. 마한이 위만조선의 유민인 진한세력에 밀린 것은 사실로 본다, 그러나 강화도로 옮겼다는 것은 의문이다. 후한서에는 준후절멸(準後絶滅) 마한자립위진왕(馬韓自立爲辰王)이라고 해서 준의 후손이 끈어진 후에 마한이 스스로 진왕을 세웠다고 했는데 이 것은 위만조선의 유민들인 변한인들에게 평양마한이 망하여 평양지방에 준왕의 왕가는 남으로 내려가고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평양마한지역에 왕이 되지 못했다고 본다, 대신 그 지역에 남은 주민들이 스스로 준왕 후예가 아닌 사람으로 왕을 삼았다는 뜻으로 본다. 강경구씨는 이를 낙랑세력으로 보았다. 남쪽으로 쫒겨 내려간 준왕의 후예는 다시 준왕 처럼 배를 타고 서해안 강화도로 내려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상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평양에서 남으로 내려올 때는 곽창권님이 [한국고대사의 구성] 책에서 지적한대로 황해도에 있는 자비령 고개만 넘으면 거의 평지를 바다보다 더 쉽게 내려올 수 있는데 해양족도 아닌 고대인들이 많은 무리를 지어 배를 타고 내려온다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듯이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이 없다, 그러므로 육로로 이동하면서 강화도를 거쳐가면서 강경구씨 설명대로 단군과 연관된 전설은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온조왕에게 멸망할 때 마한의 위치는 강화도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의 기록에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수도를 옮긴 것을 보고하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니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으로는 웅천(熊川), 서로는 대해(大海), 동으로는 주양(走壤)을 한계로 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온조왕시대에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 근처다. 이곳에서 강화도나 김포는 서쪽이지 남쪽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남쪽 경계라는 웅천을 김포로 가정하여 이곳에 책(울타리)을 세운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최후까지 저항한 원산성과 금현성을 강화도 안의 어느곳으로 지적까지하고 있다. 백제의 북과 남 그리고 동쪽 경계는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서쪽은 확실하다, 대해라고 되어 있으니까, 바다이다, 바다. 그렇다면 강화도도 이미 백제 땅인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다. 한순근님은 웅천을 지금의 안성천으로 금현성을 금산 지역으로 설명하고 있고 당시의 마한 수도를 천안으로 가정하고 있다. 곽창권님은 천안 옆에 있는 직산이나 익산설을 소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서울에서 강화가 더 오지인가 아니면 행주가 더 오지인가? 내가 만약 최후까지 저항한 믿기 어려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격리한다면 같은 조건일 때 행주산성부근 보다는 강화도가 반란을 일으켜도 섬이라 고립시켜 진압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강화에서 행주로 옮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에 영창대군이 유배되었다가 죽은 곳도 강화도고 광해군도 처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었다. 정확한 위치는 더 연구가 필요 하겠지만 단언컨데 강화도는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강경구님은 마한이 망한 장소를 강화도로 보면서 유민을 행주지방으로 옮긴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소개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온조왕 27년 여름 4월 기록에 <원산 금현의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의 이북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라고 해서 온조왕 27년 서기로 9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한이 완전히 망한해를 삼국사기는 서기 9년으로 앞 가록에서 확실히 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서기 10년으로 특별한 설명없이 고집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가끔 착각한 듯하다. 각성의 시조 이름에 대하여도 기자급친이 후세에 판각 잘못으로 우친으로 보고 우자돌림으로 이름들을 만들어 우량, 우경, 우성, 우평 등등 각 성씨의 세보마다 통일성없이 이랫다 저랫다 했다고 했지만 우리 기가족보 원편 17쪽에는 처음 숭인전비를 따라서 기씨는 평(平), 한씨는 친(親), 선우씨는 량(諒)으로 기록되있어 이를 따르다가 위지의 기록대로 우성을 따른다 하고 한씨족보도 역시 그렇다 했으며 송구하나 숭인전비가 잘못되었다 했지 우성이다가 우량이다가 우경이다가 우평이다가 필요한대로 시조이름을 사용한적이 없다. 우리 조상님이 마치 역사 조작꾼으로 설명한 것은 기분 나쁘다. 강경구님은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우리 기가에 대한 내용은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 인가가 큰 문제일뿐 그 역사의 흐름에는 동의 하며 큰 다른 의견은 없다. 사실 우리 기가의 역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리라고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점을 알려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한씨의 경우에 강경구님은 평양마한이 망한 이후에 평야에 남아 고구려의 신하가 된 것으로 설명했지만 한씨의 족보에는 백제에 마한이 망한 이후에 신라에 귀의하여 신라에서 벼슬하고 살아온 것으로 나온다. 한씨들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선우씨는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이 곤란하다. 그러나 숭인전비와 위지의 기록엔 선우, 한, 기씨가 한형제로 나오고 각 성씨가 그를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같은 기자의 후손이기는 해도 중간 중간 각성으로 분화된 것으로 나오니 이것도 문제이다. 인천이씨는 경원이씨나 인주이씨라고도 하느데 이씨의 홈피에 가보면 허기나 이허겸등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이 나오기는 해도 기가와의 연관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있다. 이씨들은 기가와의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않는데 우리만 그들을 동족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단지 시조부터 중시조사이의 900여년 사이에 기가의 씨족분화를 가정할 수 있는데 흥미가 있을 뿐이다. 참고용으로 읽기 바랍니다. 이씨가 기가와 허씨 사이에서 마치 박쥐 같은 씨족으로 묘사된 것을 알면 기분이 나쁠텐데 이를 받아들이려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에 기준왕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성씨로 서씨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가의 기록들을 찾아 올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강경구의 한, 기, 선우씨 시조설
서기 194년 패수를 지키던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공격하였을 때 준왕은 역부족하여 도망치게 되었다. 이 때 준왕은 혼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좌우의 궁인 수천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당시의 마한은 도읍지를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이 고려시대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이라고 되어 있다. 평양 지방이 마한이라는 것은 최치원이 명확히 언급했는데 평양지방에 있던 마한의 도읍에 있는 마읍산의 명칭을 보거나, 이승휴가 마한 왕검성을 평양이라고 한 것을 보거나 후한서에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였다고 한 정황 증거로 보거나 국내외의 문헌이 일치되어 있다, 국내의 규원사화나 단기고사, 환단고기등의 도가 사서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평양지방에 마한 또는 막조선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사서들의 심빙성에 대해 계속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상황이므로 그 인용은 보류하기로 한다.
이 평양 마한 지방에 준왕이 도래하여 마한을 공격 파멸시키고 새로운 왕조 즉 한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만한 정도의 국가 건설 작업을 했다면 준왕이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명을 거느리고 마한을 공격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 후한서의 기록이 위지의 기록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준왕의 남하는 해로에 의한 것 이었다고 하는데 그 경로는 난하 하구에서 출발하여 요동 반도 끝의 강상 지방을 경유하여 평양 지방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 내에 처음으로 기자족의 뿌리가 내려지게 된다. 이 때 평양지방을 정복한 기자족은 위세가 참으로 대단해서 기존의 마한왕조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조가 낙랑국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도 수세기 동안 준왕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기준 왕조는 서기전 194년에 성립되어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하자 그유민들인 진번세력에게 패망하여 남하할 때 까지 100여년 동안 영화를 누렸다. 이 동안에 당시 한을 구성하고 있던 맥족과 하층부의 예족 사이에 상당히 광범위 하게 기자 숭배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평양지방의 기자 숭배 신앙은 그 후로도 천년, 2천년을 두고 우리민족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평양을 도읍으로 한 고구려가 그후에 태양숭배의 일신, 시조숭배의 가한신과 함께 기자신을 숭배하고 그보다 또 수백년이 지난 고려 숙종 때 평양에 기자묘를 세우고 사당을 두어 기자를 숭배하고 더 나아가서 조선왕조에 와서는 문화 개명의 신으로 기자를 조선왕조의 정신적 전통으로 숭배한 것 들은 모두 기자 숭배의 뿌리 깊은 맥락이라고 하 것이다. 이 기자숭배의 전통은 서기전 100년경에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족에 의해 성립되어 전승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기준의 세력이 남하해 버린 뒤에도 반도 북부의 예족들은 기준 내지 기자 신앙을 계속 간직하였다, 그 결과 중국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족열전에 준왕의 기록이 실리게 되었다. 기자와 기준에 대한 기록이 위지 예족전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삼국지 편찬 당시까지도 평양 지방에는 준왕의 씨족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도 이 준왕계 씨족과 기자를 숭배하는 예족 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널리 번성하여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로는 기자 신앙이 고구려의 주요 지도 계급인 예족의 신앙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국신 신앙으로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잠시 민속 신앙의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예를 자칭하고 일어선 고려에 와서는 다시 국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되고 조선에 와서는 더욱 번창하여 마침내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선우씨를 택하여 기자릉의 참봉과 사당의 전적을 대대로 맡아 가도록까지 국가에서 배려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서기전 194년 평양의 마한을 공파하고 한을 세운 기준왕조는 그 뒤로 왕검성지방,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기준 집단이 평양지방에 가지고 온 문화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반도 내에서의 본격적인 철기 문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때 강성함을 자랑하던 기준왕조도 100여년이 지나면서 북쪽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는 새로운 유이민 집단 때문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전 108년과 107년에 걸쳐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자 이민족의 통치를 피하여 진번 등 위만 조선의 여러 제후국들이 속속 동남 지방인 한반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84년 마침내 이 기준정권 내에서 정변이 생겼다. 어윤적의 동사연표는 이것을 [왕이 진변의 난리를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평양을 습격한 것은 진변(혹은 진번, 진한)이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정작 진변은 평양에 정착하지 않고 더욱 남하하여 한강을 가로 질러 낙동강 유역에 분포 정착하게 된다. 이 평양 지방에는 잠깐 권력의 진공 상태가 있었는데 그것을 메꾼 것이 바로 진번과 같이 위만 조선에서 내려온 낙랑 세력이 었다고 추측된다. 진변의 침공에 무너진 기준계 왕실의 말로는 처음 요서의 난하 하류에서 망명할 때 해로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평양에서 또다시 망명해 나가는 데에도 해로를 이용하였던 것 같다. 동사연표에는 준왕계가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갔다고 되어 있으나 이 지리산은 지리산(地理山) 또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고유의 원래이름이 두루뫼, 두루모리 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름의 산이라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어서 꼭 지리산(智異山)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평양 지방에서 해로로 남하한 준왕계가 다시 정착한 곳은 어디일까? 우선 생각할수 있는 것은 당연히 서해안 어느 곳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로 한강 이남의 지방에는 평양에서 준왕에 쫓겨난 마한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준왕계가 또 마한을 공파 했으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억설이 되기 쉽고 그러한 아무런 역사상 문헌상 소전이 없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서기 9년 기준계의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백제의 기반이 되는 한강 유역 근처에 자리잡았다고 보아 크게 틀림이 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점을 고랴하면 기준계의 마한이 남하하여 자리잡은 곳은 지금의 강화도가 거의 틀림이 없다.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삼랑산성(三郞山城)이 정족산(鼎足山)에 남아 있어 유명한데 이 삼랑산을 풀어 보면 세(三)+돌(郞)+뫼(山) 가 되고 정족산을 풀이하면 솥(鼎)+다리(足)+뫼(山) 가 되어서 삼랑산, 즉 세돌이뫼는 정족산, 즉 솥다리뫼가 되어 결국은 세돌이나 솥다리나 같은 말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세 나 솥은 일종의 접두어이므로 그것을 빼면 돌이뫼 다리뫼 가 되어 동사연표의 두루뫼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동사연표에 나오는 지리산 두류산은 지금의 강화도 정족산이라고 추정하며 이 정족산 옆에 단군이 제사를 드렸다는 마니산참성단(摩尼山塹星壇)이 있는 것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도 기준계의 왕실이 강화도에 왔을 때 북방의 정통 왕조인 단국(檀國)의 왕족이라고 즉 단군이라고 자칭하였던 것 같으며 그 결과 이 마니산 참성단이나 정족산 삼랑산성이 단군과 관계 있는 듯이 전해 내려온다고 본다.
이번에는 정통적으로 기자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우는 한씨 기씨 선우씨를 살펴보자. 우선 한씨는 준왕이 마한을 공격하고 지금의 평양 지방에 도읍하면서 한왕이라고 자칭한데서 비롯한다. 그 후에 기자조선에 남은 그의 자제와 친척들이 한씨라고 자칭하였다고 위략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망명한 준왕 및 그 직계 비속들도 한씨라고 칭하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 된다. 한씨 성이 물론 이 준왕 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천왕이 서기전 9세기경 한씨라고 자칭한 뒤 기자국의 끝 왕인 준왕이 해로로 평양 지방으로 망명한 뒤 한씨의 대종이 평양지방의 한씨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평양의 한씨 마한 세력은 백여년 동안 매우 강성하여 현지의 예족 주민들로부터 고조선 천왕의 칭호인 단군의 신분과 호칭을 증정받기까지 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단군으로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준왕의 후예들이 강화도에 망명하였을 때 현지의 주민들이 그들을 단군이라고 숭배하여 그들의 족적인 삼랑산성이나 마니산참성단 등이 단군의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 등에서 그렇게 추측된다, 좀더 생각하면 고조선의 3대 제후국인 변한 진한 마한의 가간이 모두 단군이라고 자칭한 듯 하다(신채호, 정인보 선생설). 그런데 진변의 침략으로 망명한 것은 한왕 세력의 전부가 아니었다.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강화도의 마한 세력이 크게 떨치지 못하고 서기 9년 신흥의 백제 세력에 멸망당한 것이라든지 평양지방에 그 후로도 계속 한씨의 강성한 방자취가 나타나 있음을 볼 때 그렇게 본다.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낙랑의 유적이나 유물 가운데 한씨의 성을 명기한 것이 많은 것은 한씨가 당시 낙랑의 주요한 집권 세력에 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씨의 주류 세력이 평양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고 강화도로 망명한 집단은 그다지 대규모의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양지방의 한씨는 낙랑이 멸망하고 그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된 뒤에도 왕씨와 함께 재지호족으로서 고구려에 종사하였다. 불행하게도 고구려 시대의 한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않는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한씨 세력은 안승을 따라 남하하여 익산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이것이 익산 지방의 토성으로 나타나는 한씨의 기원이다. 대문 실복(大文 悉伏)의 난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 옮겨져 흩어질 때 한씨는 지금의 청주 지방인 서원경에 대대적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결과 익산 한씨는 극히 일부만 익산에 남고 대부분은 청주 지방에 옮겨져서 한씨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판명해 두어야 할 것은 한씨, 기씨, 선우씨의 시조라고 전해 오는 우친(友親), 우성(友誠), 우량(友諒), 우평(友平) 등의 이름이다. 이는 이 우(友)자 돌림의 이름들은 위략의 중세 어느 판본에 기자급친(其子及親;그 아들과 친척들)이 기자우친(其子友親)으로 즉 급(及)자가 우(友)자로 잘못 판각(板刻)되어 그 아들 이름이 우친(友親)인 듯이 전해지게 되었고 다른 이름들은 우(友)자 돌림을 넣어 후세에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각 세보마다 시조를 우친이라고도 하고 우량이라고도 하고 우성이라고도 하고 우평이라고도 하여 통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 한씨의 경우 평양 지방에서 번성하다가 고구려 멸망 후 익산, 청주 등지로 남하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 기씨의 경우를 살펴보면 좀더 다른 행적을 보게 된다. 기씨는 본관인 행주의 위치로 보나 기준계 마한의 역사적 지리적 행적으로 보나 초기 백제사와 마한의 접촉으로 보나 다름 아닌 강화도 마한의 후예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강화도로 남하한 기준계 마한의 후예가 서기 9년 초기 백제에 병합되는데 이 강화도 마한의 후예가 바로 행주 기씨라는 것이다. 온조왕 즉위 4년 만에 온조왕의 한성 세력은 강화도 마한의 정벌에 착수하여 지금의 김포(金浦)에 웅천책(熊川柵)을 세운다, 그리고 서기 9년 마침내 강화도 정족산의 삼랑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마한의 잔여 세력들은 원산성(圓山城; 豆無達城)과 금현성(錦峴城)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그 다음 해에야 완전히 평정된다. 이 두무달(豆無達)은 강화 하음현(河陰縣; 옛 동음내(冬音奈))에 비정되고 금현(錦峴)은 진강(鎭江)의 대모성(大母城)에 비정되어 둘 다 강화도 내의 지역으로 생각된다. 온조왕은 서기 10년 강화도의 마한을 완전히 평정하고 마한 왕족 즉 기준왕의 후예들을 지금의 행주 지방으로 옮겼다고 생각된다. 행주기씨세보(幸州奇氏世譜)에 기씨가 백제의 온조왕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읽어야 비로소 참된 역사적 사실로서 재평가 받을 수 있게 된다.
준왕의 후예가 행주 지방으로 옮겨져 준왕에 대한 제사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지 위지 한전에 [준왕의 후예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한인(韓人) 중에는 지금도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기씨가 강화도로부터 행주 지방으로 옮겨진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세론적으로 보아 온조왕 때를 벗어날 수 없을 것 이며 그섯도 왕전히 멸망당한 서기 10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서기 10년경 행주지방에 옮겨진 기씨 집단이 그후 2000여년을 같은 지역에서 지내 오면서 언제 기(奇)라는 성씨를 정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백제 시대의 일이 틀림없다.
그 다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선우씨이다, 선우씨는 1930년 일제하 국세 조사 당시 80% 이상이 평안 남북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선우씨의 경우 다른 성씨와 달리 그들의 본관인 용강(龍岡)지방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 곳에서 성장해 왔다, 다시말해서 선우씨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남하하거나 북상하지 않고 본거지에 토착하여 자치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본관인 태원(太原)을 중보문헌비고에서는 충주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으나 이미 천관우 선생의 지적한 바와 같이 충주 지방에는 태원이라는 지명이 없고 태원은 지나의 산서성(山西省)의 지명으로서 기자족(箕子族)의 원주지였던 곳의 지명이다. 임승국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전국 시대 중산국왕(中山國王)의 성씨가 선우(鮮虞)씨로서 기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우씨(鮮虞氏)가 선우씨(鮮于氏)임에 틀림없다면 선우씨의 기원을 멀리는 기자에게서 찾게 되거니와 그 사이에 중산국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하겠다. 선우씨의 세보에 준왕의 후예라고 하였으나 이와 같이 중산국의 후예임이 밝혀진 까닭에 증보문헌비고의 성씨조 총목에 기록된 것처럼 기자의 방계(기준의 방계를 잘못 쓴 듯하다) 지파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세보에 선우씨가 용강의 황룡국(黃龍國)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우씨가 고구려 시대 이래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용강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믿을 만한 가승이라고 생각된다. 황룡국은 고구려 초기에 서요하 유역에 인접하고 있던 소국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에 흡수되었고 그 지배층은 고구려의 상층부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 황룡국 세력이 용강 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남하한 이후이다.
따라서 선우씨 세력은 은나라의 기자국 후예로서 태원 지방에 있던 중산국에 일차 집결하였다가 진한 때에 서요하로 이동하여 황룡국을 건설하였고 고구려의 발흥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상층 지도부를 구성했다고 생각된다.
인주(인천, 경원) 이씨를 보자.
인주 이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는 이허겸(李許謙)인데 그 아버지는 준(浚)이었다고 하며 본래의 성은 기(奇)씨 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허겸의 조상 중에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성(李姓)을 처음 사성(賜姓)받은 시조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보 전승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신리 시대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연달아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왕명으로는 경명왕(景明王) 승영(昇英)을 일명 김박영(金朴英)이라고도 한 것이 눈에 띄며 그 밖에 개인 이름으로는 김양박(金梁博), 김장렴(金張廉) 등이 있다, 따라서 세보에 전하는 허기(許奇)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성 허와 어머니의 성 기를 연달아 붙여서 만든 가공적 인물이 아니가 생각된다, 김해 김씨와 허씨가 갈라지고 허씨에서 인주이씨가 갈라져 나간 뒤로도 아버지성 이와 어머니성 허를 연달아 말해서 시조의 이름이 이허겸인 것에서도 짐작된다, 일단 증보문헌비고에 실려 있는 대로 본성이 기(奇)라는 소전을 더 신뢰한다고 할 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세보에 나오는 허기라는 이름은 가공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공적인 이름이 그나마 한 가닥 암시해 주는 것이 있다면 조작적인 이름에 기(奇)자를 넣음으로서 인주 이씨의 본성이 기씨이었다는 방증을 남긴 것이라 할 수있다.
이 인주 이씨의 씨족은 덕양 기씨의 한 지파(支派)였는데 기씨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한씨 선우씨 등과 함께 기자조선의 끝왕인 기준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인주지방에 기성의 분파가 정착한 것은 행주와 인천의 가까운 지리상으로 보아 사리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나 정작 그 시기에 애해서는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인주 기씨가 당나라의 황실성인 이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이 씨족이 크게 융성하였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족적기반(族的基盤)이 형성되기까지는 몇 세기의 세월이 걸렸으리라는 점,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에 오면 벌써 각 지방에 씨족 분화와 함께 호족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기씨 일파의 인주 정착 분화는 이미 삼국 시대의 일 즉 서기 6~7세기경의 일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전통 깊은 지방세력과 중앙에서 세력을 잃은 가락 허씨의 결합에서 인주이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며 이 인주 이씨는 시대에 따라 그 조상 설화 중에 허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기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00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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