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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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기 우성(友誠)
백제 온조왕때에 벼슬이 시중
2세; 기 창원(昌原)
지국공신으로 벼슬이 상장군
3세; 기 안식(安植)
백제 다루왕때 벼슬이 상장군
4세; 기 대략(大略)
백제 기루왕때 벼슬이 상장군
5세; 기 방(芳)
백제 개루왕때 벼슬이 토국대장군
6세 ; 기 격(格)
백제 초고왕때 벼슬이 중랑장
7세; 기 맹웅(猛熊)
백제 구수왕때 벼슬이 시중
8세; 기 택목(擇木)
벼슬이 상장군
9세; 기 달원(達元)
백제 책계왕때 벼슬이 좌장군
10세; 기 철(徹)
백제 분서왕때 벼슬이 우장군
11세; 기 종(宗)
백제 비류왕때 벼슬이 무군대장군
12세; 기 호(護)
백제 근초고왕때 벼슬이 학사
13세; 기 통(通)
백제 근구수왕때 벼슬이 태자사전
14세; 기 충원(忠元)
백제 침류왕때 사공
15세; 기 예인(禮仁)
백제 진사왕때 교위관
16세; 기 유(諭)
백제 아신왕때 벼슬이 시랑
17세; 기 안조(安祖)
백제 구이신왕때 벼슬이 종사관 훈도
18세; 기 혜민(惠民)
좌장군
19세; 기 봉국(奉國)
백제 개로왕때 교위
20세; 기 진(晉)
문학관 교수
21세; 기 관평(寬平)
백제 문주왕때 태자사전
22세; 기 대도(大度)
문창수
23세; 기 명철(明哲)
백제 동성왕때 종사관 훈도
24세; 기 신위(伸威)
중랑장, 신(伸)은 중(仲)과 같은 뜻이다
25세; 기 수(遂)
백제 무령왕때 랑중
26세; 기 홍(弘)
호군대장
27세; 기 혼(渾)
백제 위덕왕때 청도수
28세; 기 국량(國良)
서원수
29세; 기 운룡(雲龍)
스스로 적성수로 들어가 우장군이 되다
30세; 기 건덕(建德)
백제 의자왕때 종사랑,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산으로 들어가다
31세; 기 종국(宗國)
신라 신문왕때 학사, 처음으로 백제에서 신라로 옮겨 아간대부가 되다.
32세; 기 봉양(鳳陽)
신라 효소왕때 회문수
33세; 기 온(溫)
신라 성덕왕때 문천수
34세; 기 황(晃)
영양수
35세; 기 순(淳)
시중랑
36세; 기 집(緝)
종사관
37세; 기 홍(洪)
동천수
38세; 기 욱(煜)
신라 선덕왕때 철원수
39세; 기 후(厚)
사직
40세; 기 항(恒)
동성수
41세; 기 문덕(文德)
신라 애장왕때 낭해수로 옮겨 학사가 되다. 해(海)는 덕(德)과 같은 뜻이다
42세; 기 빈(彬)
의(義)를 행하여 마산령이 되다
43세; 기 직(稷)
신라 흥덕왕때 문학관 교수
44세; 기 유(裕)
금릉수
45세; 기 정(靖)
신라 문성왕때 학사
46세; 기 휴(휴)
대방수로 옮겨 중직대부가 되다
47세; 기 승(勝)
복천수
48세; 기 전무(剪武)
신라 진성여왕때 관산령
49세; 기 장(章)
중추부사 겸 방어사
50세; 기 민(敏)
신라 신덕왕때 덕양수로 고향에 돌아오시다
51세; 기 형(荊)
신라 경애왕때 시랑, 나라의 앞날을 미리 내다보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수의 북 송산아래에 살며 생명을 보전하시다
52세; 기 익호(翼虎)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철원으로 궁예를 공격할때 송도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좌장군으로 삼았다, 공이 높아서 시호가 성무공(成武公)이시다, 성(成)은 위(威)와 같은 뜻이다
53세; 기 흥국(興國)
고려 정종때 시중
54세; 기 교선(敎先)
고려 광종때 시중
55세; 기 총(總)
문하시어사
56세; 기 요(曜)
고려 경종때 조산대부 겸 문하사
57세; 기 연(淵)
문하시랑
58세; 기 계홍(啓弘)
종사관 훈도
59세; 기 사일(賜一)
고려 현종때 판각문하시어호분장
60세; 기 무점(武點)
문하시랑
61세; 기 영(英)
고려 정종때 문하시어금부장
62세; 기 눌(訥)
진산령
63세; 기 병(柄)
통정대부 동부승지
64세; 기 해보(海甫)
사례직강
65세; 기 문유(文儒)
고려 숙종때 동천수
66세; 기 순우(純祐)
중시조, 고려 인종때 문하평장사
위에 기씨 성을 얻은 후의 세계가 있다.
기씨는 옛날 세계를 적은 책 한권이 헌납 기윤헌공의 집에 전해지고 있었다, 은나라 태사 기자는 조선에 봉해져서 마한의 원왕에 까지 이르럿다,원왕의 아들이 기씨로 성을 얻었다. 영의정에 추증된 기응세때에 두권도 아닌 단한권을 잊어버렸다. 그 끝의 작은 기록에는 기자이하 역대와 시조 기우성이하 63세 기병할아버지까지 즉 64세 기해보할아버지가 손으로 쓴 기록이 있다. 기해보에서 기응세까지는 또한 영의정 기자헌의 소유였다. 천개 갑자년(1624) 사이에 기윤헌이 사형당하자 아들 기수실이 가슴에 품고 남쪽 록도로 피난가서 그손자 기정의에 이르렀다, 처음 얻어서 기윤헌공이 백패(?)중일 때로 숙종 계사(1713)~갑오(1714)년 사이이다.갑진년(1664), 무진년(1688)에 족보를 만들때에는 옛 세계가 없어서 고려때 평장사 기순우를 시조로 했다, 갑오보(1714)에 이르러 처음으로 옛 세계를 보탰다. 기씨가 성을 얻은 이후 고려시대 평장사 기수전까지 무릇 67세가 형제없는 홀로의 기록인 이 긴 기록은 지금의 족보와 다름없는, 무진보에서 평장공 기순우를 1세로 하면서 옛날과 끈어진 67세를 복원한 단 하나의 옛 기록이다. 위로 부터 이어진 궁금증을 밎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또한 기닙은 무진보 끝글에서 옛 기록이 세상에 나타난 전말을 볼수있게 기록했다, 성을 얻은 이후 갑오년에 빠진 기록이 이번에 처음 모두 기록하게 됬다 그러나 늦었지만 미리 찿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라고 기록되있고 덧붙여 다음 기록도 나온다.
후손 기닙이 집안에 보관되어온 고계의 끝글에 기록하기를 세월이 흘러 갑오년 4월에 먼 친척아저씨 기정락이 그 아들 기환에게 이 세계를 받들고 나(기 닙)을 방문하게 했다.내(기 닙)가 묻기를 이것은 옛날에 없었으나 지금엔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고귀한 것이다, 내(기닙)가 세수하고 받들어 살펴보니 평장사공 기순우 이전 즉 기자이후의 전하지 않던 기록이었다 놀랍고 기뻐서 이번엔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의심하여 묻자 기환이 대답하기를 안악공 기윤헌의 집안이 이괄의 난때 몰살 될때 그아들 기수실이 이 책을 가슴에 품고 해남으로 흘러 록도에 정착해 살며 보관해왔다, 둘째아들의 들째아들 기유정때에 이르러 처음 글자를 알게 되고 옛 기록을 열람하였는데 이때는 기윤헌공이 백패중일 때이다라 했다, 이기록은 글자 획은 완연하여 비록 알아볼수 있었지만 그 종이는 너무 오래되어 손으로 만지면 찢어질 듯 몇 백년이 흘러 왔는 지 짐작할수 없는 책이었다. 드디어 책이 전하여 짐으로써 보장된 근본을 이루었다. 슬프다 ! 이 기록이 어찌 전성기의 날엔 구름속에서 나오지 않고 약해져 부진할때 나왔던가? 드높음이 기울어 없어지고 때가 있으나 자연히 그연대를 역대총람을 고찰하여 취한다. 과연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으니 그 믿음에 탄식이 난다.
2001-12-14
백제 온조왕때에 벼슬이 시중
2세; 기 창원(昌原)
지국공신으로 벼슬이 상장군
3세; 기 안식(安植)
백제 다루왕때 벼슬이 상장군
4세; 기 대략(大略)
백제 기루왕때 벼슬이 상장군
5세; 기 방(芳)
백제 개루왕때 벼슬이 토국대장군
6세 ; 기 격(格)
백제 초고왕때 벼슬이 중랑장
7세; 기 맹웅(猛熊)
백제 구수왕때 벼슬이 시중
8세; 기 택목(擇木)
벼슬이 상장군
9세; 기 달원(達元)
백제 책계왕때 벼슬이 좌장군
10세; 기 철(徹)
백제 분서왕때 벼슬이 우장군
11세; 기 종(宗)
백제 비류왕때 벼슬이 무군대장군
12세; 기 호(護)
백제 근초고왕때 벼슬이 학사
13세; 기 통(通)
백제 근구수왕때 벼슬이 태자사전
14세; 기 충원(忠元)
백제 침류왕때 사공
15세; 기 예인(禮仁)
백제 진사왕때 교위관
16세; 기 유(諭)
백제 아신왕때 벼슬이 시랑
17세; 기 안조(安祖)
백제 구이신왕때 벼슬이 종사관 훈도
18세; 기 혜민(惠民)
좌장군
19세; 기 봉국(奉國)
백제 개로왕때 교위
20세; 기 진(晉)
문학관 교수
21세; 기 관평(寬平)
백제 문주왕때 태자사전
22세; 기 대도(大度)
문창수
23세; 기 명철(明哲)
백제 동성왕때 종사관 훈도
24세; 기 신위(伸威)
중랑장, 신(伸)은 중(仲)과 같은 뜻이다
25세; 기 수(遂)
백제 무령왕때 랑중
26세; 기 홍(弘)
호군대장
27세; 기 혼(渾)
백제 위덕왕때 청도수
28세; 기 국량(國良)
서원수
29세; 기 운룡(雲龍)
스스로 적성수로 들어가 우장군이 되다
30세; 기 건덕(建德)
백제 의자왕때 종사랑,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산으로 들어가다
31세; 기 종국(宗國)
신라 신문왕때 학사, 처음으로 백제에서 신라로 옮겨 아간대부가 되다.
32세; 기 봉양(鳳陽)
신라 효소왕때 회문수
33세; 기 온(溫)
신라 성덕왕때 문천수
34세; 기 황(晃)
영양수
35세; 기 순(淳)
시중랑
36세; 기 집(緝)
종사관
37세; 기 홍(洪)
동천수
38세; 기 욱(煜)
신라 선덕왕때 철원수
39세; 기 후(厚)
사직
40세; 기 항(恒)
동성수
41세; 기 문덕(文德)
신라 애장왕때 낭해수로 옮겨 학사가 되다. 해(海)는 덕(德)과 같은 뜻이다
42세; 기 빈(彬)
의(義)를 행하여 마산령이 되다
43세; 기 직(稷)
신라 흥덕왕때 문학관 교수
44세; 기 유(裕)
금릉수
45세; 기 정(靖)
신라 문성왕때 학사
46세; 기 휴(휴)
대방수로 옮겨 중직대부가 되다
47세; 기 승(勝)
복천수
48세; 기 전무(剪武)
신라 진성여왕때 관산령
49세; 기 장(章)
중추부사 겸 방어사
50세; 기 민(敏)
신라 신덕왕때 덕양수로 고향에 돌아오시다
51세; 기 형(荊)
신라 경애왕때 시랑, 나라의 앞날을 미리 내다보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수의 북 송산아래에 살며 생명을 보전하시다
52세; 기 익호(翼虎)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철원으로 궁예를 공격할때 송도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좌장군으로 삼았다, 공이 높아서 시호가 성무공(成武公)이시다, 성(成)은 위(威)와 같은 뜻이다
53세; 기 흥국(興國)
고려 정종때 시중
54세; 기 교선(敎先)
고려 광종때 시중
55세; 기 총(總)
문하시어사
56세; 기 요(曜)
고려 경종때 조산대부 겸 문하사
57세; 기 연(淵)
문하시랑
58세; 기 계홍(啓弘)
종사관 훈도
59세; 기 사일(賜一)
고려 현종때 판각문하시어호분장
60세; 기 무점(武點)
문하시랑
61세; 기 영(英)
고려 정종때 문하시어금부장
62세; 기 눌(訥)
진산령
63세; 기 병(柄)
통정대부 동부승지
64세; 기 해보(海甫)
사례직강
65세; 기 문유(文儒)
고려 숙종때 동천수
66세; 기 순우(純祐)
중시조, 고려 인종때 문하평장사
위에 기씨 성을 얻은 후의 세계가 있다.
기씨는 옛날 세계를 적은 책 한권이 헌납 기윤헌공의 집에 전해지고 있었다, 은나라 태사 기자는 조선에 봉해져서 마한의 원왕에 까지 이르럿다,원왕의 아들이 기씨로 성을 얻었다. 영의정에 추증된 기응세때에 두권도 아닌 단한권을 잊어버렸다. 그 끝의 작은 기록에는 기자이하 역대와 시조 기우성이하 63세 기병할아버지까지 즉 64세 기해보할아버지가 손으로 쓴 기록이 있다. 기해보에서 기응세까지는 또한 영의정 기자헌의 소유였다. 천개 갑자년(1624) 사이에 기윤헌이 사형당하자 아들 기수실이 가슴에 품고 남쪽 록도로 피난가서 그손자 기정의에 이르렀다, 처음 얻어서 기윤헌공이 백패(?)중일 때로 숙종 계사(1713)~갑오(1714)년 사이이다.갑진년(1664), 무진년(1688)에 족보를 만들때에는 옛 세계가 없어서 고려때 평장사 기순우를 시조로 했다, 갑오보(1714)에 이르러 처음으로 옛 세계를 보탰다. 기씨가 성을 얻은 이후 고려시대 평장사 기수전까지 무릇 67세가 형제없는 홀로의 기록인 이 긴 기록은 지금의 족보와 다름없는, 무진보에서 평장공 기순우를 1세로 하면서 옛날과 끈어진 67세를 복원한 단 하나의 옛 기록이다. 위로 부터 이어진 궁금증을 밎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또한 기닙은 무진보 끝글에서 옛 기록이 세상에 나타난 전말을 볼수있게 기록했다, 성을 얻은 이후 갑오년에 빠진 기록이 이번에 처음 모두 기록하게 됬다 그러나 늦었지만 미리 찿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라고 기록되있고 덧붙여 다음 기록도 나온다.
후손 기닙이 집안에 보관되어온 고계의 끝글에 기록하기를 세월이 흘러 갑오년 4월에 먼 친척아저씨 기정락이 그 아들 기환에게 이 세계를 받들고 나(기 닙)을 방문하게 했다.내(기 닙)가 묻기를 이것은 옛날에 없었으나 지금엔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고귀한 것이다, 내(기닙)가 세수하고 받들어 살펴보니 평장사공 기순우 이전 즉 기자이후의 전하지 않던 기록이었다 놀랍고 기뻐서 이번엔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의심하여 묻자 기환이 대답하기를 안악공 기윤헌의 집안이 이괄의 난때 몰살 될때 그아들 기수실이 이 책을 가슴에 품고 해남으로 흘러 록도에 정착해 살며 보관해왔다, 둘째아들의 들째아들 기유정때에 이르러 처음 글자를 알게 되고 옛 기록을 열람하였는데 이때는 기윤헌공이 백패중일 때이다라 했다, 이기록은 글자 획은 완연하여 비록 알아볼수 있었지만 그 종이는 너무 오래되어 손으로 만지면 찢어질 듯 몇 백년이 흘러 왔는 지 짐작할수 없는 책이었다. 드디어 책이 전하여 짐으로써 보장된 근본을 이루었다. 슬프다 ! 이 기록이 어찌 전성기의 날엔 구름속에서 나오지 않고 약해져 부진할때 나왔던가? 드높음이 기울어 없어지고 때가 있으나 자연히 그연대를 역대총람을 고찰하여 취한다. 과연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으니 그 믿음에 탄식이 난다.
200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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