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2004. 08.3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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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마을을 찾아서-<14>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행주기씨(상)
(상)유래.입향
기묘사화후 기진과 자손들 ‘명문가’ 명맥이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적시는 오후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자리한 행주기씨 집성촌을 찾았다.
광곡마을은 임곡동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쯤 지나 장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며 임곡동 북단 백우산 자락의 서쪽사면에 자리해 있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옆으로 황룡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마을로 예로부터 ‘넓은 계곡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너브실’ 또는 ‘너부실’의 한자표기인 ‘광곡’(廣谷)이 마을명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곡마을의 총호수는 45호, 주민수는 90여명으로 행주기씨 37호, 밀양박씨 2호, 전주이씨 2호, 파평윤씨 2호, 광산김씨와 원주원씨가 각각 1호씩 분포해 있다.
다른 동족마을과 마찬가지로 50대가 가장 젊은층일 정도로 주민들의 고령화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이 촌로들의 설명이다.
광곡마을은 원래 조선 초기 평산신씨들이 들어와 개촌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최소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로 추정된다.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임곡동(옛 임곡면)은 조선시대에는 광주목 소고령면과 나주목 오산면 지역으로 오산면은 1906년 9월부터 1914년까지 함평군으로 이관됐다가 같은 해 행정구역 개편 때 2개 면을 합해 광주군 임곡면으로 개편됐다.
이후 88년 광산군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광산군 임곡면에서 광산구 임곡출장소가 됐고 임곡출장소는 95년 1월 임곡동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곡동 관내 법정동은 임곡동·등임동·산막동·고룡동·광산동 등 9개가 있고 광곡마을은 광산동에 포함된다.
기씨는 본을 행주로 하는 단일본관으로 고조선시대 때부터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성씨 중 하나로 광곡마을 행주기씨 집성촌은 장흥고씨, 충주박씨 집성촌과 더불어 광주의 3대 집성촌으로 분류된다.
득성시조인 기우성은 기자의 48대 왕자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조선에 연원을 둔 기자의 직계후예로는 기씨와 한씨, 선우씨가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행주기씨보’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준왕(準王·기자의 40대손)의 후손으로 우성, 우평, 우량 등 3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 기(奇)씨와 선우(鮮于)씨, 한(韓)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같은 성씨 기원의 유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망 있는 가문임을 내세우고자 하는 면이 다분하다는 견해도 있다.
기씨 선대의 정식 계보는 고려 중기 때 인물인 순우를 중시조로 하며 고려시대 이래로 중앙에 거주하며 막강한 권한을 가진 요직을 두루 맡으면서 명문거족으로 성장한 성씨로 분류된다.
행주기씨 자손들이 나주 광곡마을에 입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정암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인물 중 기준(奇遵)이라는 사람이 포함돼 있는데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기준의 희생에서 알 수 있듯 기씨 일파가 사화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이 오늘날 임곡동 관내 신용동 신룡마을이었다고 한다.
기준은 기대승(奇大升)의 부친인 기진(奇進)의 막내 동생으로 형과 우애가 깊었고 기묘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했다.
이때 고봉 기대승의 부친인 기진도 남하해 이 마을에 살았는데 기진의 아들들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위관직에 올랐다.
이중 고봉 기대승이 뛰어난 업적을 이뤄 ‘광국공신훈’으로 백우산 일대 임야와 전답을 사패지로 받은 뒤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고봉은 학문연마를 위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터를 잡고 있었던 평산신씨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 자리를 행주기씨들이 채우면서 집성촌의 기반을 마련해 수백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특별취재반
<행주기씨 주요문화재>
고봉 제향 ‘월봉서원’ 대표적
행주기씨 주요 문화재는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자리해 있고, 문중 차원에서 관리와 보존이 이뤄져 후손들에게 가문과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이중 월봉서원은 행주기씨 집안의 대표적 문화재로 꼽힌다. 이 서원은 고봉 기대승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그 시초는 고봉이 서거한 7년 후인 조선 선조 11년 1578년 호남의 유림들이 광산군 임곡면 신용동 고명봉의 낙암 아래 망천사우를 세운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서원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유림들이 광산군 비아면 산월동 망월봉 아래 서원을 세워 조정에 상소해 효종 5년 1654년 8월 ‘월봉서원’으로 사액후 중수됐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절됐다.
이후 자손들이 서원 복원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림들과 관계당국의 협조와 배려로 원래 위치가 아닌 임곡면 광산리 빙월당이 있는 곳에 사우 3칸과 동재 4칸, 서재 4칸 등을 복원해 지난 1991년 낙성했다.
매년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사액 당시 주벽인 고봉선생 한분만 제향하고 있고 지난 1979년 빙월당과 묘역 일원이 전남도 지방문화재 제38호와 광주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또 고봉선생 묘소는 임곡동 광곡마을 뒷편의 백우산 중턱의 넓고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묘소는 부인 함풍이씨와 나란히 누워 있는 쌍분으로 묘소 자리는 선생이 살아계실 때 미리 잡아두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칠송정은 마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대승의 아들 효증이 지난 1650년 세운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이후 중수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형태로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칠송정이라는 명칭은 주변에 일곱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후재’는 광곡마을 앞산 기슭에 있는 기언복을 제향하는 재실로 지난 1870년 후손들이 세웠다. 좌우의 방 전면에 분합문을 설치한 약간 특이한 형태의 재실이다.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행주기씨<15>(중)공동체 역할
예절중시 기씨가풍 영향 ‘미풍양속의 마을’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은 주류를 이루는 행주기씨 외에도 파평윤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광산김씨, 원주원씨 등 6개 성씨가 모여 살며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백여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도 주민간 뚜렷한 갈등이나 분쟁 없이 이웃사촌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통장 등의 마을 임원은 주민 대다수를 이루는 기씨들이 현실적 여건을 감안해 맡아왔으며, 마을의 크고 작은 대소사를 관장해 왔다.
하지만 기씨들이 소수파 성씨들을 소외시키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통장과 개발위원장 등 주요 직책은 자신들이 맡고 노인회 간부 등 일부 자리를 다른 성씨에 분담해 다양한 주민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마을통장의 임기는 대개 4∼5년이며 지금은 기원달(65)씨가 맡고 있다.
따라서 광곡마을 공동체 문화는 통장직을 비롯, 마을노인회와 광곡회장 등 주요 공동체를 기씨들이 맡아 마을 현안이나 사업 추진시 반목이나 갈등 없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광곡마을은 여러 성씨들이 모여사는 혼성마을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고봉의 후손과 행주기씨 가풍이 향촌사회를 이룬 이념적 기반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됨과 동시에 지역사회와 주민의 공동체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파평윤씨 등 소수파 성씨들은 마을의 특정한 사안 추진을 놓고 협력과 의사의 단일화가 요구될 때 때로는 적극적 협조를 통해, 의견수렴시에는 암묵적 협조와 지지를 통해 다수의 정서에 순응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대개 농업에 종사하고 집성촌을 지탱해 온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농지인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집성촌에서 나타나는 마을공동체문화는 농경문화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사에 있어서는 예로부터 양반동네에다 많은 농토를 소유한 지주들이 많아 마을 대부분의 농지가 광곡마을 사람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로 인해 주변 마을사람들은 경작지 확보를 위해 광곡마을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들에 의해 거의 모든 농지가 경작됐고 경작 형태는 ‘고지’가 다수를 차지했다.
‘고지’는 논 1마지기에 받아쓰는 돈이나 현물(나락)을 말하며 흔히 고지를 하기로 하고 돈이나 나락을 받는 것을 ‘고지먹는다’라고 했다.
이같은 고지문화는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소작인들의 농토난을 가중시키는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광곡마을에는 고지먹는 사람과 땅주인과의 관계를 잘 표현한 속담으로 ‘여름에는 일해달라고 사정사정하고 겨울에는 샌님샌님해도 문도 잘 안 열어준다’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올 정도다.
앞서 언급했듯 광곡마을 내에서 집단 또는 계층의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기원달 광곡마을 통장은 “기씨가 90% 이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데다 이웃주민들이 대부분 조부나, 삼촌, 조카 등 친척이기 때문이나 언쟁이나 대립은 나타나지 않았고 예부터 웃어른에 대한 예절과 몸가짐이 엄격했는데 이같은 기씨 가풍이 마을풍속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특히 기씨문중에서는 마을 내 동족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조차 일어난 경우가 없어 이같은 가풍은 오늘날까지도 전통적 덕목이자 소중한 미풍양속의 하나로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처럼 수백여년을 이어온 기씨 가풍을 중심으로 한 광곡마을 공동체 문화는 웃어른에 대한 예절과 존경, 주민들간 협력과 유대, 양보와 겸양의 미덕으로 각박해져가는 현대 산업사회에도 계승해야 할 소중한 덕목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광곡마을 공동체 조직]
전통장례식.품앗이 지금도
광곡마을 공동체 조직은 마을 총회와 마을부녀회, 마을노인회, 광곡회 등이 있으며 이들 조직은 주민들의 참여와 활동을 통해 마을 대소사의 역할과 기능을 분담하고 있다.
먼저 마을 총회는 각 세대주를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매년 연초에 정기총회가 열리며 마을의 통장이 운영위원들과 협의를 거쳐 회의 일정과 사안 등을 주민들에게 알린다.
주요 안건은 1년 동안의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자리로 특별한 현안사업이 없는 경우 대개 마을 임원을 선출하고 삯꾼의 노임과 기계 사용료를 정한다.
‘마을부녀회’는 60대를 주축으로 구성되는데 급격한 이농과 인구격감으로 고령화가 뚜렷해지고 있으며 회원들의 적립금 등으로 ‘경로위안잔치’를 여는 등 작지만 알찬사업으로 독특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광곡마을노인회는 55세 이상 마을거주 남녀주민으로 구성되며 현재 회원은 50여명이다. 임원선정은 특정 성씨에 구애를 받지 않는 편이며 마을의 제반문제에 적극 관여하는 실제적인 조직체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광곡회’는 광곡마을 청년회로 단순한 청년회 기능을 뛰어넘어 위친계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지난 85년 구성됐고 50대 전후의 젊은층의 남자 회원 18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마을에 살다가 도시로 출향한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광곡회의 가장 큰 역할은 마을에 특정인이 상을 당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서 상을 무사히 치르도록 협조하는 것이며 장의차를 이용한 도시 장례문화를 대신해 지금까지 전통 관혼상제의 풍습과 품앗이 문화의 잔존을 엿볼 수 있다.
광주.전남 문화캡슐 동족마을을 찾아서 <16>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행주기씨 (하)
가문 번창과 후손
文武로 진충보국 孝悌로 가문명성‘귀감’
행주기씨 가문은 고조선시대부터 이땅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사실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행주기씨들이 고려시대 들어 중시조 순우(純祐)와 아들 수전(守全)이 문하평장사를 지내는 등 문관을 배출했고, 이때 상당수 선조들이 무예에 통달해 장상(將相)을 지낸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가 대략 가문 번영의 틀을 다진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따라서 기씨들은 고려 시대 융성하게 된 씨족으로 고려 인종 때 평장사를 지낸(지낸 것이 아니라 추증된) 순우를 중시조로 해서 오늘날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순우의 아들 수전은 평장사를 지냈고 순우의 손자인 윤우(윤우가 아니라 윤위)와 윤숙은 이장대의 난과 여진족(여진족이 아니라 거란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큰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자오의 아들 철과 원이 요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공민왕 즉위후 친원세력에 대한 제거가 시작되면서 쇠퇴기를 겪고 조선시대 중흥기를 맞는다.
이중 9대손인 면(勉)은 공조전서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아들 건(虔)이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건은 조선 세종 때 포의로 발탁돼 지평이 된 후 단종 때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은거해 청백리로 추앙됐다. 세조는 측근 권람을 시켜 3차례나 건의 출사를 종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면의 손자 축(軸)은 풍저창부사를 역임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됐고 축의 아들 찬은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응교와 이조참판에 증직됐다.
찬은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형은 도승지에 직제학을 지냈고(진낸것이 아니라 추증되었고) 차남 원은 참판을 지낸 후(지낸 후가 아니라 나중에 손자 효근이 선무3등공신이 되면서 추증) 장성으로 낙향해 뿌리를 내렸다.
원의 손자인 효간(孝諫)은 선조 때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효근(孝謹)이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워 선무공신 3등에 책훈됐다.
노사 기정진은 효간의 후손으로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이때 형성된 장성의 기씨 일문이 오늘날 광주 광곡마을 기씨 집성촌과 더불어 동족마을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남 괄은 이렇다할 벼슬은 지내지 않고(별좌 벼슬을 지냈고) 대관과 대정 등 두 아들을 두었고 4남인 진은 머리가 총명해 경서에 통달했으나 동생 복재공 준이 사화에 연루돼 죽음을 당하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했다.
그는 모친인 숙인 김씨의 뜻을 받들어 1522년 사마시에 합격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고 5년 후 장사랑에 올랐으나 1526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뒤 벼슬을 버리고 광주로 이사했다.
진은 슬하에 대림(大臨), 대승(大升), 대절(大節) 등 3형제(와 소과라는 아들을 두었음)를 두었는데 특히 고봉 기대승의 학문과 재주가 가장 뛰어났다.
대승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을 돌보면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 선조 집권 초기 부제학 대사간까지 올랐으나 과감히 벼슬길을 버린다.
고봉은 특히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주제로 8년 동안이나 서신을 왕복해 벌인 논쟁은 당대 사상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될만큼 유명한 일화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봉은 후일 광국공신에 녹훈되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됨과 동시에 덕성군에 봉해져(좌찬성과 덕성군은 아버지에게 추증 봉군된 것이고 고봉선생은 덕원군에 봉군됨)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다.
막내인 준은 고봉의 부친인 형 진과 우애가 깊었고 조카인 대승에게 많은 학문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준은 인륜도덕으로 효제(孝悌)를 매우 중시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갔다가 사사했다.
준의 이같은 인륜도덕 중시는 기씨 가풍과 동족마을을 지탱해 온 공동체 문화의 자양분이자 뿌리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 행주기씨 후손들은 광곡마을에 집성촌을 이어오며 나라가 어려울 때는 남다른 충절의 표상으로, 평화시에는 지역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인륜과 도덕, 충절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 가문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특별취재반
<행주기씨 주요 인물과 묘제>
월봉서원 제향 유림주관 범지역행사로
행주기씨 집안은 가문의 유구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 때는 무관을, 조선시대 들어서는 고봉 기대승 등 학문과 사상면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나왔다.
이중 기효간은 기대승의 조카로 숙부인 고봉과 하서 김인후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일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해 ‘호남의 은덕군자’로 불린다.
그는 동문인 김천일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했고 사후에 호조참의가 추증됐다.
기효근은 효간의 아우로 자는 사과(司果)이다. 효근은 성격이 호방해 38세 때인 선조 12년 1579년 무과해 급제해 선전관이 됐다가 1590년 해남현령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기효증은 고봉의 아들로 호는 함재(涵齋).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우사가 돼 격문을 짓고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에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다.
현대에 들어서는 서울고법원장과 전남대 법과대 초대 학장을 지낸 기세훈 고봉학술원장을 비롯, 기세익 전 전남지방경찰청장, 기갑서 전 순천시 부시장, 기세록 전 전남대 불문과 교수 등을 배출했다.
행주기씨 문헌공파의 조상을 받드는 의례로는 묘제와 부조묘 제사, 서원제향 등이 있고 문헌공파 대문중단위의 묘제는 4일간 이뤄진다.
이중 음력10월 15일에는 고봉 기대승과 아들 효증, 손자 정헌 및, 동생 대절 등 4위(位)의 묘제를 지내며 가장 많은 종원들이 참석하는데 제수는 광곡마을의 문중답을 경작하는 문중원 집에서 마련한다.
대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행주기씨 문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월봉서원의 제향으로 유림들 주관으로 이뤄지며 문중행사의 범위를 넘어 범지역적인 행사로 치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2004. 08.30
(상)유래.입향
기묘사화후 기진과 자손들 ‘명문가’ 명맥이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적시는 오후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자리한 행주기씨 집성촌을 찾았다.
광곡마을은 임곡동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쯤 지나 장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며 임곡동 북단 백우산 자락의 서쪽사면에 자리해 있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옆으로 황룡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마을로 예로부터 ‘넓은 계곡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너브실’ 또는 ‘너부실’의 한자표기인 ‘광곡’(廣谷)이 마을명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곡마을의 총호수는 45호, 주민수는 90여명으로 행주기씨 37호, 밀양박씨 2호, 전주이씨 2호, 파평윤씨 2호, 광산김씨와 원주원씨가 각각 1호씩 분포해 있다.
다른 동족마을과 마찬가지로 50대가 가장 젊은층일 정도로 주민들의 고령화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이 촌로들의 설명이다.
광곡마을은 원래 조선 초기 평산신씨들이 들어와 개촌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최소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로 추정된다.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임곡동(옛 임곡면)은 조선시대에는 광주목 소고령면과 나주목 오산면 지역으로 오산면은 1906년 9월부터 1914년까지 함평군으로 이관됐다가 같은 해 행정구역 개편 때 2개 면을 합해 광주군 임곡면으로 개편됐다.
이후 88년 광산군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광산군 임곡면에서 광산구 임곡출장소가 됐고 임곡출장소는 95년 1월 임곡동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곡동 관내 법정동은 임곡동·등임동·산막동·고룡동·광산동 등 9개가 있고 광곡마을은 광산동에 포함된다.
기씨는 본을 행주로 하는 단일본관으로 고조선시대 때부터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성씨 중 하나로 광곡마을 행주기씨 집성촌은 장흥고씨, 충주박씨 집성촌과 더불어 광주의 3대 집성촌으로 분류된다.
득성시조인 기우성은 기자의 48대 왕자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조선에 연원을 둔 기자의 직계후예로는 기씨와 한씨, 선우씨가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행주기씨보’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준왕(準王·기자의 40대손)의 후손으로 우성, 우평, 우량 등 3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 기(奇)씨와 선우(鮮于)씨, 한(韓)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같은 성씨 기원의 유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망 있는 가문임을 내세우고자 하는 면이 다분하다는 견해도 있다.
기씨 선대의 정식 계보는 고려 중기 때 인물인 순우를 중시조로 하며 고려시대 이래로 중앙에 거주하며 막강한 권한을 가진 요직을 두루 맡으면서 명문거족으로 성장한 성씨로 분류된다.
행주기씨 자손들이 나주 광곡마을에 입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정암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인물 중 기준(奇遵)이라는 사람이 포함돼 있는데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기준의 희생에서 알 수 있듯 기씨 일파가 사화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이 오늘날 임곡동 관내 신용동 신룡마을이었다고 한다.
기준은 기대승(奇大升)의 부친인 기진(奇進)의 막내 동생으로 형과 우애가 깊었고 기묘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했다.
이때 고봉 기대승의 부친인 기진도 남하해 이 마을에 살았는데 기진의 아들들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위관직에 올랐다.
이중 고봉 기대승이 뛰어난 업적을 이뤄 ‘광국공신훈’으로 백우산 일대 임야와 전답을 사패지로 받은 뒤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고봉은 학문연마를 위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터를 잡고 있었던 평산신씨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 자리를 행주기씨들이 채우면서 집성촌의 기반을 마련해 수백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특별취재반
<행주기씨 주요문화재>
고봉 제향 ‘월봉서원’ 대표적
행주기씨 주요 문화재는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자리해 있고, 문중 차원에서 관리와 보존이 이뤄져 후손들에게 가문과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이중 월봉서원은 행주기씨 집안의 대표적 문화재로 꼽힌다. 이 서원은 고봉 기대승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그 시초는 고봉이 서거한 7년 후인 조선 선조 11년 1578년 호남의 유림들이 광산군 임곡면 신용동 고명봉의 낙암 아래 망천사우를 세운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서원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유림들이 광산군 비아면 산월동 망월봉 아래 서원을 세워 조정에 상소해 효종 5년 1654년 8월 ‘월봉서원’으로 사액후 중수됐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절됐다.
이후 자손들이 서원 복원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림들과 관계당국의 협조와 배려로 원래 위치가 아닌 임곡면 광산리 빙월당이 있는 곳에 사우 3칸과 동재 4칸, 서재 4칸 등을 복원해 지난 1991년 낙성했다.
매년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사액 당시 주벽인 고봉선생 한분만 제향하고 있고 지난 1979년 빙월당과 묘역 일원이 전남도 지방문화재 제38호와 광주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또 고봉선생 묘소는 임곡동 광곡마을 뒷편의 백우산 중턱의 넓고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묘소는 부인 함풍이씨와 나란히 누워 있는 쌍분으로 묘소 자리는 선생이 살아계실 때 미리 잡아두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칠송정은 마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대승의 아들 효증이 지난 1650년 세운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이후 중수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형태로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칠송정이라는 명칭은 주변에 일곱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후재’는 광곡마을 앞산 기슭에 있는 기언복을 제향하는 재실로 지난 1870년 후손들이 세웠다. 좌우의 방 전면에 분합문을 설치한 약간 특이한 형태의 재실이다.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행주기씨<15>(중)공동체 역할
예절중시 기씨가풍 영향 ‘미풍양속의 마을’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은 주류를 이루는 행주기씨 외에도 파평윤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광산김씨, 원주원씨 등 6개 성씨가 모여 살며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백여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도 주민간 뚜렷한 갈등이나 분쟁 없이 이웃사촌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통장 등의 마을 임원은 주민 대다수를 이루는 기씨들이 현실적 여건을 감안해 맡아왔으며, 마을의 크고 작은 대소사를 관장해 왔다.
하지만 기씨들이 소수파 성씨들을 소외시키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통장과 개발위원장 등 주요 직책은 자신들이 맡고 노인회 간부 등 일부 자리를 다른 성씨에 분담해 다양한 주민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마을통장의 임기는 대개 4∼5년이며 지금은 기원달(65)씨가 맡고 있다.
따라서 광곡마을 공동체 문화는 통장직을 비롯, 마을노인회와 광곡회장 등 주요 공동체를 기씨들이 맡아 마을 현안이나 사업 추진시 반목이나 갈등 없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광곡마을은 여러 성씨들이 모여사는 혼성마을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고봉의 후손과 행주기씨 가풍이 향촌사회를 이룬 이념적 기반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됨과 동시에 지역사회와 주민의 공동체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파평윤씨 등 소수파 성씨들은 마을의 특정한 사안 추진을 놓고 협력과 의사의 단일화가 요구될 때 때로는 적극적 협조를 통해, 의견수렴시에는 암묵적 협조와 지지를 통해 다수의 정서에 순응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대개 농업에 종사하고 집성촌을 지탱해 온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농지인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집성촌에서 나타나는 마을공동체문화는 농경문화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사에 있어서는 예로부터 양반동네에다 많은 농토를 소유한 지주들이 많아 마을 대부분의 농지가 광곡마을 사람들 소유의 땅이었다.
이로 인해 주변 마을사람들은 경작지 확보를 위해 광곡마을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들에 의해 거의 모든 농지가 경작됐고 경작 형태는 ‘고지’가 다수를 차지했다.
‘고지’는 논 1마지기에 받아쓰는 돈이나 현물(나락)을 말하며 흔히 고지를 하기로 하고 돈이나 나락을 받는 것을 ‘고지먹는다’라고 했다.
이같은 고지문화는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소작인들의 농토난을 가중시키는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광곡마을에는 고지먹는 사람과 땅주인과의 관계를 잘 표현한 속담으로 ‘여름에는 일해달라고 사정사정하고 겨울에는 샌님샌님해도 문도 잘 안 열어준다’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올 정도다.
앞서 언급했듯 광곡마을 내에서 집단 또는 계층의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기원달 광곡마을 통장은 “기씨가 90% 이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데다 이웃주민들이 대부분 조부나, 삼촌, 조카 등 친척이기 때문이나 언쟁이나 대립은 나타나지 않았고 예부터 웃어른에 대한 예절과 몸가짐이 엄격했는데 이같은 기씨 가풍이 마을풍속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특히 기씨문중에서는 마을 내 동족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조차 일어난 경우가 없어 이같은 가풍은 오늘날까지도 전통적 덕목이자 소중한 미풍양속의 하나로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처럼 수백여년을 이어온 기씨 가풍을 중심으로 한 광곡마을 공동체 문화는 웃어른에 대한 예절과 존경, 주민들간 협력과 유대, 양보와 겸양의 미덕으로 각박해져가는 현대 산업사회에도 계승해야 할 소중한 덕목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광곡마을 공동체 조직]
전통장례식.품앗이 지금도
광곡마을 공동체 조직은 마을 총회와 마을부녀회, 마을노인회, 광곡회 등이 있으며 이들 조직은 주민들의 참여와 활동을 통해 마을 대소사의 역할과 기능을 분담하고 있다.
먼저 마을 총회는 각 세대주를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매년 연초에 정기총회가 열리며 마을의 통장이 운영위원들과 협의를 거쳐 회의 일정과 사안 등을 주민들에게 알린다.
주요 안건은 1년 동안의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자리로 특별한 현안사업이 없는 경우 대개 마을 임원을 선출하고 삯꾼의 노임과 기계 사용료를 정한다.
‘마을부녀회’는 60대를 주축으로 구성되는데 급격한 이농과 인구격감으로 고령화가 뚜렷해지고 있으며 회원들의 적립금 등으로 ‘경로위안잔치’를 여는 등 작지만 알찬사업으로 독특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광곡마을노인회는 55세 이상 마을거주 남녀주민으로 구성되며 현재 회원은 50여명이다. 임원선정은 특정 성씨에 구애를 받지 않는 편이며 마을의 제반문제에 적극 관여하는 실제적인 조직체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광곡회’는 광곡마을 청년회로 단순한 청년회 기능을 뛰어넘어 위친계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지난 85년 구성됐고 50대 전후의 젊은층의 남자 회원 18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마을에 살다가 도시로 출향한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광곡회의 가장 큰 역할은 마을에 특정인이 상을 당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서 상을 무사히 치르도록 협조하는 것이며 장의차를 이용한 도시 장례문화를 대신해 지금까지 전통 관혼상제의 풍습과 품앗이 문화의 잔존을 엿볼 수 있다.
광주.전남 문화캡슐 동족마을을 찾아서 <16>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행주기씨 (하)
가문 번창과 후손
文武로 진충보국 孝悌로 가문명성‘귀감’
행주기씨 가문은 고조선시대부터 이땅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사실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행주기씨들이 고려시대 들어 중시조 순우(純祐)와 아들 수전(守全)이 문하평장사를 지내는 등 문관을 배출했고, 이때 상당수 선조들이 무예에 통달해 장상(將相)을 지낸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가 대략 가문 번영의 틀을 다진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따라서 기씨들은 고려 시대 융성하게 된 씨족으로 고려 인종 때 평장사를 지낸(지낸 것이 아니라 추증된) 순우를 중시조로 해서 오늘날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순우의 아들 수전은 평장사를 지냈고 순우의 손자인 윤우(윤우가 아니라 윤위)와 윤숙은 이장대의 난과 여진족(여진족이 아니라 거란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큰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자오의 아들 철과 원이 요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공민왕 즉위후 친원세력에 대한 제거가 시작되면서 쇠퇴기를 겪고 조선시대 중흥기를 맞는다.
이중 9대손인 면(勉)은 공조전서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아들 건(虔)이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건은 조선 세종 때 포의로 발탁돼 지평이 된 후 단종 때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은거해 청백리로 추앙됐다. 세조는 측근 권람을 시켜 3차례나 건의 출사를 종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면의 손자 축(軸)은 풍저창부사를 역임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됐고 축의 아들 찬은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응교와 이조참판에 증직됐다.
찬은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형은 도승지에 직제학을 지냈고(진낸것이 아니라 추증되었고) 차남 원은 참판을 지낸 후(지낸 후가 아니라 나중에 손자 효근이 선무3등공신이 되면서 추증) 장성으로 낙향해 뿌리를 내렸다.
원의 손자인 효간(孝諫)은 선조 때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효근(孝謹)이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워 선무공신 3등에 책훈됐다.
노사 기정진은 효간의 후손으로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이때 형성된 장성의 기씨 일문이 오늘날 광주 광곡마을 기씨 집성촌과 더불어 동족마을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남 괄은 이렇다할 벼슬은 지내지 않고(별좌 벼슬을 지냈고) 대관과 대정 등 두 아들을 두었고 4남인 진은 머리가 총명해 경서에 통달했으나 동생 복재공 준이 사화에 연루돼 죽음을 당하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했다.
그는 모친인 숙인 김씨의 뜻을 받들어 1522년 사마시에 합격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고 5년 후 장사랑에 올랐으나 1526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뒤 벼슬을 버리고 광주로 이사했다.
진은 슬하에 대림(大臨), 대승(大升), 대절(大節) 등 3형제(와 소과라는 아들을 두었음)를 두었는데 특히 고봉 기대승의 학문과 재주가 가장 뛰어났다.
대승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을 돌보면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 선조 집권 초기 부제학 대사간까지 올랐으나 과감히 벼슬길을 버린다.
고봉은 특히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주제로 8년 동안이나 서신을 왕복해 벌인 논쟁은 당대 사상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될만큼 유명한 일화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봉은 후일 광국공신에 녹훈되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됨과 동시에 덕성군에 봉해져(좌찬성과 덕성군은 아버지에게 추증 봉군된 것이고 고봉선생은 덕원군에 봉군됨)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다.
막내인 준은 고봉의 부친인 형 진과 우애가 깊었고 조카인 대승에게 많은 학문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준은 인륜도덕으로 효제(孝悌)를 매우 중시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갔다가 사사했다.
준의 이같은 인륜도덕 중시는 기씨 가풍과 동족마을을 지탱해 온 공동체 문화의 자양분이자 뿌리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 행주기씨 후손들은 광곡마을에 집성촌을 이어오며 나라가 어려울 때는 남다른 충절의 표상으로, 평화시에는 지역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인륜과 도덕, 충절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 가문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특별취재반
<행주기씨 주요 인물과 묘제>
월봉서원 제향 유림주관 범지역행사로
행주기씨 집안은 가문의 유구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 때는 무관을, 조선시대 들어서는 고봉 기대승 등 학문과 사상면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나왔다.
이중 기효간은 기대승의 조카로 숙부인 고봉과 하서 김인후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일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해 ‘호남의 은덕군자’로 불린다.
그는 동문인 김천일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했고 사후에 호조참의가 추증됐다.
기효근은 효간의 아우로 자는 사과(司果)이다. 효근은 성격이 호방해 38세 때인 선조 12년 1579년 무과해 급제해 선전관이 됐다가 1590년 해남현령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기효증은 고봉의 아들로 호는 함재(涵齋).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우사가 돼 격문을 짓고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에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다.
현대에 들어서는 서울고법원장과 전남대 법과대 초대 학장을 지낸 기세훈 고봉학술원장을 비롯, 기세익 전 전남지방경찰청장, 기갑서 전 순천시 부시장, 기세록 전 전남대 불문과 교수 등을 배출했다.
행주기씨 문헌공파의 조상을 받드는 의례로는 묘제와 부조묘 제사, 서원제향 등이 있고 문헌공파 대문중단위의 묘제는 4일간 이뤄진다.
이중 음력10월 15일에는 고봉 기대승과 아들 효증, 손자 정헌 및, 동생 대절 등 4위(位)의 묘제를 지내며 가장 많은 종원들이 참석하는데 제수는 광곡마을의 문중답을 경작하는 문중원 집에서 마련한다.
대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행주기씨 문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월봉서원의 제향으로 유림들 주관으로 이뤄지며 문중행사의 범위를 넘어 범지역적인 행사로 치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200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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