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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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기철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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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298회 작성일 21-03-1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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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은 몽고 이름으로 백안불화(伯顔不花)이며 행주(幸州) 사람이었다.

그의 고조(高祖) 기윤숙(奇允肅)은 성격이 사치를 좋아하고 호협한 일을 좋아하였다. 최충헌에게 아부해서 상장군으로 뛰어올라서 두 성(省)을 경력했는데 일찍이 황의(黃衣)를 입고 “어라! 비켜서라!”라고 고함 치면서 창기(娼妓) 집으로 유흥하러 왕래했으므로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뒤에서 손가락질하면서 웃었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강정(康靖)이었다.

기철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는 음관(陰官)으로 산원(散員)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총부 산랑이 되었다가 선주(宣州) 수령으로 나갔고 63세에 죽었다. 그는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기식(奇軾), 기철(奇徹),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을 낳았는데 기식(奇軾)은 조사(早死)했으며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후궁(後宮)으로 뽑혀 가서 제2황후로 되었는데 그가 황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충혜왕 때에 황제가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태감(太監) 박첨목아불화(朴帖木兒不花)를 파송하여 기자오에게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 칭호를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했으며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주었다. 그리고 한림학사 구양현(歐陽玄)을 시켜 묘비의 글을 지어 보내 주었으며 그의 처 이씨에게 영안왕 대부인(榮安王大夫人) 작위를 주고 그 집문에 ‘정절(貞節)’이라는 정표를 세워 주었으며 누차 사신을 보내서 옷과 술을 주었다. 또 기철을 행성(行省) 참지정사로, 기원을 한림학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도 기철을 정승으로 임명하고 덕성 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했으며 기원은 덕양군(德陽君)으로 봉했다.

기철, 기원, 기주, 기윤은 기황후의 세를 믿고 욕심을 부리고 방자했으며 그의 친척들도 곁따라 교만하고 횡포했다.

기원이 어느 때 일가 친척들을 모아서 자기 어머니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기명이며 요리가 지극히 사치하고 화려해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처 이씨는 기씨의 친척이었는데 충혜왕이 그 집으로 가서 강간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전자유는 처와 함께 도망쳤다.

기륜이 전마파(田麻頗)와 함께 내료(內僚) 등촉배(燈燭輩)를 구타했으므로 충혜왕이 화가 나서 직접 전마파와 기륜의 집으로 가서 전마파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고 또다시 기륜의 집으로 가서 기륜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면서 그 사이에 악소배(惡少輩)를 기륜의 집으로 보내서 또 전마파를 수색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염돈소(廉敦紹)는 기철의 매부인데 그 집 종이 상전의 세를 믿고 매우 세를 부렸는데 그의 일당 5∼6명이 공모하고 남의 유부녀를 빼앗아서 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강제로 데려 왔다. 사흘 밤을 경과한 후 비로소 그 시집에서 알고 고소하니 왕이 화나서 순군에 가두고 국문한 결과 모두 다 자백했으므로 곤장 치고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기주가 포악해서 전국이 고통을 당했는데 충목왕이 정치 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니 기주는 자기 죄를 알고 망명했으나 양광도 안렴사 김규가 잡아 보내서 도감이 곤장 쳤다.

기철의 족제(族弟) 기삼만이 또 세를 믿고 불법 행위를 마음대로 했고 남의 전토를 강탈했으므로 정치 도감이 곤장 치고 순군에 투옥하였더니 20일 남짓해서 죽었다. 그의 처가 행성 이문소(理問所)에 고소해서 도감관 서호(徐浩) 등이 투옥되었는데 판 도감사(判都監事) 정승 김영돈(金永旽)이 왕에게

“전하는 어째 정치관을 가두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기삼만이 남의 전토를 5결(結)을 강탈했다는데 그것이 무슨 죽일 죄야 되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김영돈이 말하기를

“기삼만이 세를 믿고 그 행악이 쌓이고 쌓였는데 어찌 전토 5결을 강탈한 것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나라에서 기삼만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공부 낭중 아로(阿魯)와 협부 낭중 왕호류(王胡劉) 등을 보내 와서 국문하였다. 아로 등이 행성에 좌정하고 서호를 심문하려고 목에 항쇄를 채우고 끌어내어 오니 기삼만의 동생 기선재가 서호를 보고 욕하기를

“우리 형이 네 처를 몇 번이나 강간했길래 악감을 품고 우리 형을 곤장 쳐서 죽였느냐!”라고 하니 서호는 말하기를

“우리 처는 사족(士族)의 딸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 만약 종년이나 첩이면 반드시 그런 추잡한 행실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기선재의 어미가 천인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원나라에서 다시 직성 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서 서호 등을 곤장 쳤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기철과 왕후(王煦)를 섭정동성사(攝征東省事)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어느 날 행성으로 가서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려 하였는데 기철이 임금과 말을 나란히 세워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려 하였으므로 공민왕이 호위 군사들을 시켜서 앞뒤로 갈라 놓고 호위하도록 함으로써 곁에 오지 못하게 하였다.

조일신이 기씨 형제들을 죽이려고 수하 사람들을 보냈는데 기원은 살해 당하고 기철은 도망가 숨어서 화를 면했다.

공민왕과 공주가 여러 번 기철의 모친 이씨 집으로 가서 연회를 가졌다.

공민왕이 글을 보내 원나라에 청하기를

“우리 나라 선조 때부터 옹서의 사이로 되었으며 사대부의 풍습이 비록 중국(中原)에 비하여 부끄러운 바 있으나 천행으로 귀국의 대우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제 영안왕 대부인(大夫人) 이씨는 사대부의 예절바른 명문 귀족의 후예로서 고이 기른 그의 따님께서 후궁으로 들어가시었다. 듣건대 귀 황실의 예법에 소위 패아찰이란 것이 있어서 인아(姻亞)간에 모여서 즐기며 자손을 위하여 경축한다고 한다. 옛날에도 이같이 하여 왔는데 지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폐하께서 대부인 이씨를 위하여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여 화락한 가운데서 깊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면 9족(族)이 모두 친척간에 화목하자는 당신의 뜻에 감격할 것이며 길이길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할 것입니다. 또 일국이 충심으로 찬미하여 천지가 다 하도록 영생 불로하시기를 축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만만태자(巒巒太子)와 정안 평장(定安平章) 등을 파견하여 패아찰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왕과 공주가 연경궁(延慶宮)으로 갔다. 공주와 태자는 남향하고 공민왕은 서향하고 이씨는 동향하여 좌정한 후 공민왕이 술을 권하면서 선참으로 꿇어 앉아서 태자에게 술잔을 권했다. 태자가 일어서서 받아 마신 후 태자가 술을 부어 처음으로 이씨에게, 다음으로 공민왕, 공주의 순차로 잔을 권했다.

연회가 한창 흥겨워질 무렵에 사신과 그 수행자들이 서편 섬돌로 올라와 앉고 호위 인원들이 동편 섬돌로 올라앉은 후 고기를 차려 놓고 먹기 내기를 하면서 즐겼는데 많이 먹고 먼저 먹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다.

연회가 끝나자 일동이 뜰로 내려가서 나란히 섰는데 서편에는 사신들이, 동편에는 기철과 권겸(權謙) 등이 섰다. 각각 몽고 노래를 부르면서 무도를 하며 전진하여 뜰 한복판에 모여 저사(紵絲) 한 필을 풀어서 일동이 모두 잡고 둥글게 둘러서서 3∼4회 빙글빙글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 다음 각각 잡고 있던 천을 조각조각 잘라서 가졌다. 이 연회에서 꽃 만드는데 5천 1백44 필의 포백이 소비되고 기타의 물자도 이에 상응하게 소모되어 이로 인한 물가의 폭등이 있었으므로 공적, 연회, 사적, 연회와 불공 기도 등에 기름, 꿀, 과실 등을 사용치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때부터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지 않은 해가 없었다.

고려에서는 이씨를 위하여 경창부(慶昌府)라는 부(府)를 설치하였다.

원나라에서 직성 사인(直省舍人) 망가(忙哥)를 보내서 기철에게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 벼슬을 제수하고 겸해서 의복과 술을 주었다.

공민왕이 어떤 사건으로 과오를 범한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곤장치고 귀양 보냈더니 기철이 왕에게 말하기를

“규정(糾正)이 비록 죄가 있더라고 후세에 구실을 남길 우려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은 즉시 석방했다.

원나라에서 공민왕에게 공신 칭호를 주었을 때 기철이 마침 요양으로부터 모친을 보러 돌아왔다. 그때 시를 지어 공민왕을 축하하면서 신하란 말을 쓰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기원의 아들 완자불화(完者不花)를 파견하여 영안왕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代)를 왕으로 추봉하였으며 기철에게 대사도(大司徒) 벼슬을 주었다.

그때 권겸(權謙), 노정이 자기 딸들을 원나라에 바치고 총행을 얻고 있었으므로 기철은 권겸 등과 기맥이 상통하여 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천하는 어지러워지고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여 원망을 쌓아 두었으니 일조에 세력을 잃으면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자기 보신책으로 그들의 친척과 심복들을 권력 있는 요직에 포치하고 은밀히 당파를 규합해서 대역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각 도(道)의 병기를 검열했으며 또한 조서(詔書)를 봉행하는 사신이라고 속이고 요언을 전파했으며 비밀히 집합 시일을 지정하여 거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먼저 알고 대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다 하고 재추들을 모두 궁정(宮庭)으로 소집하고 판 밀직 홍의(洪義)와 재신(宰臣) 배천경(裴天敬) 등을 보내서 기철, 노정, 권겸과 기철의 아들 찬성사 기유걸(奇有傑)과 조카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 권겸과 그 아들 만호 권항(權恒) 사인(舍人) 권화상(權和尙), 노정의 아들 행성 낭중 노제(盧濟) 등을 불렀는데 기철과 권겸이 먼저 왔다. 그래서 밀직 경천흥(慶千興), 황석기(黃石奇), 판사 신청(申靑) 등이 가만히 공민왕에게 말하기를

“두 명이 이미 왔는데 기타의 그의 자질들과 노정 부자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르겠은즉 일찍이 처단하는 것이 상책이겠습니다”라고 하니 왕도 옳게 여기고 즉시 밀직 강중경(姜仲卿)과 대호군 목인길(睦仁吉), 우달적(于達赤) 이몽대(李蒙大) 등에게 명령을 주어 장사(壯士)들을 시켜 불의에 뛰어들어 철퇴로 치니 기철은 단번에 쓰러졌고 권겸은 피해 달아났으므로 자문(紫門)까지 따라가서 죽였는데 피가 궁문에 뛰었다. 드디어 기철의 추종자 두 명을 죽이고 시체를 주교(朱橋)에 버렸다.

홍의는 병정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기가와 권가의 휘하들이 낭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금위 4번 군사들이 일시에 발동되어 적들을 잡았는데 칼과 창이 길목마다에서 번쩍이었다.

강중경 등이 군사들을 인솔하고 노정을 그 집에서 잡아 죽이고 부천동(北泉洞) 노상에 시체를 버려 두었다.

기유걸은 배천경과 함께 예궐하는 도중에 사변이 생긴 소식을 듣고 도망쳐서 숨었다. 기완자불화, 노제, 권항, 권화상 등과 그 도당들도 모두 도망쳤으므로 각 처로 수색 체포할 것을 명령하고 세 집(기철, 권겸, 노정의 집)의 노비(奴婢)들을 몰수하여 의성창(義成倉), 덕천창(德泉倉), 유비창(侑備倉) 등에 예속시켰다.

이때 많은 무뢰배들이 난리의 틈을 타서 약탈을 하였으므로 궁성을 계엄하였는데 재집(宰執)으로부터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병장기를 갖추고 숙위했다.

공민왕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왕업을 창건하여 왕통을 후대에 전하고 관아를 설치하고 법을 세우니 상하가 서로 보전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 충혜왕이 원나라에 귀부하니 세조가 오랜 풍속의 보존을 허락하여 무휼(撫恤)했고 우리도 직무와 조공에 성의를 다하여 신절(臣節)을 조금도 어긴 바 없었다.

그런데 이제 기철, 노정, 권겸 등이 원나라 조정이 무휼하여 준 뜻과 선왕이 세워서 전해 준 법을 무시하고 권세를 독차지하여 임금을 업신여겨 위세(威勢)를 부리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면서 국법을 도무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제실(帝室)과 인아간인 것을 생각하고 그의 말은 일일이 다 들어주었는데 오히려 부족하여서 반역을 음모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천행으로 천지와 조종의 신령에 힘입어 기철 등은 이미 처단되었다. 도망간 흉도 기유걸, 기완자불화, 노제, 권항, 권화상 등은 그 죄를 용서치 못하겠다. 그리고 한가귀(韓可貴), 구정(具貞) 등은 나라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반역자를 놓아 주었으니 이도 또한 법에 의하여 치죄할 것이다. 반역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에게는 반역자의 가산으로 그 공로에 따라 상 줄 것이다. 상기 이외의 사람들의 범행은 일체 묻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철 등이 인구와 전토를 강점하였으므로 도첨의사가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신고를 받아서 각각 본주인에게 반환하였다.

미구에 기유걸, 기완자불화, 노제, 권화상들을 체포하여 사형했으며 권항만은 평소에 권세를 부리고 악행한 바가 없었으므로 죽이지 않고 제주로 귀양 보냈다.

기유걸을 죽일 때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단 한 사람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동생 상호군 기세걸(奇世傑)과 평장 기새인첨목아(奇賽因帖木兒)는 당시 원나라에 있었으므로 형벌을 면했다. 기철의 처 김씨는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여승으로 된 것을 붙잡고 순군에 가두었으며 어린 아이 기새인(奇賽因)도 역시 머리를 깎아 왕흥사에 숨겨 둔 것을 잡아 죽였다.

그 도당인 김영군(金寧君), 김보(金普), 밀직부사 이야선첨목아(李也先帖木兒), 행성 원외 조만통(趙萬通), 동첨(同僉) 홍익(洪翊), 찬성 황하연(黃河衍), 평리 이수산(李壽山), 밀직 왕중귀(王重貴), 대언 황하안(黃河晏), 호군 황하식(黃河湜), 전대언 홍개도(洪開道), 전우윤(前右尹) 전림(田霖), 선공령(繕工令), 김의렬(金義烈), 환자 대호군 정용장(鄭龍莊)을 귀양 보내고 전 밀직 임군보(任君輔), 전 광흥창사(前廣興倉使) 임인기(林仁起), 전 호군 김남득(金南得), 전 낭장 노지경(盧之卿) 등을 곤장 쳤다. 그리고 이어 정용장, 홍익, 황하연을 죽이고 세 집 재산을 몰수하여 관아에서 공매하면서 태묘령(太廟令) 장천핵에게 그 일을 주관케 하였다. 장천핵은 남몰래 자기 집 종을 시켜 포목 17필을 납입하고 비단 이불을 사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비단 이불 값이 포목 17필은 아닌데 무슨 연줄로 입수하였느냐”라고 하면서 모두 따져 물으니 그 종이 말하기를

“나는 공매하는 관원인 장천핵의 종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사대에서 치죄할 것을 청했으나 그의 동생 대호군 장천지(張天志)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특히 용서하고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쳤다.

기철 등이 처단되니 이씨는 근심으로 병석에 누웠다. 당시에 나라에서 서북면으로 장병들을 파견하여 원나라에 대한 경비를 하면서 다만 봄 가을 두 차례 조공(朝貢)을 보내 연계를 맺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서신 왕래가 자못 적조했었다. 그래서 원(元)나라의 황태자가 금강길사(金剛吉思)를 보내서 이씨를 데려 가려고 했으나 이씨가 굳이 사양하여 사신이 세 번이나 왕래했다. 황태자는 또 첨사원(詹事院) 첨승(僉丞) 보동(保童)을 파견하여 의복과 음식을 보냈으며 금강길사는 머물러 있으면서 이씨를 공양하였다. 그 후 이씨가 죽었을 때에는 나라에서 장사를 차려 주고 부의로 쌀 2백 석, 포목 2천 5백 필을 보냈다.

기세걸의 처 방씨(房氏)는 평리 방언휘(房彦暉)의 딸인바 기씨 가문이 멸망하자 김용이 방언휘를 협박 유인해서 방씨를 간음했으나 방씨는 유부녀인 까닭에 김용도 감히 제처로 삼지 못하고 그의 문객인 정언 최수자(崔守雌)의 처로 주었다. 그 후 김용이 귀양 가자 왕이 방언휘와 최수자를 순군에 가두고 곤장 쳤다. 김용이 사형당하자 사람들이 방씨(房氏)를 빼앗았으나 후에 기세길이 원(元)나라로 데려갔다.

원나라가 멸망하자 기새인첨목아는 요심(遼瀋) 관리 평장 김백안(金伯顔), 우승 합날파두(哈刺波豆), 참정 덕좌불화(德左不花) 등과 더불어 멸망한 원나라의 패잔 역량을 규합해 가지고 동녕부(東寧府)를 할거(割據)하면서 그 아비를 죽인 한을 품고 고려 북부를 침공하여 복수하려 하였으므로 공민왕이 지용수(池龍壽), 양백안(楊伯顔)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더니 기새인첨목아는 그만 도망쳤다. 그 전말은 지용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200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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