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흥령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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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흥령사 징효대사 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헌덕왕 18, 826~ 효공왕 4, 900)의 비로 보물 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썻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어 924년에야 비문을 지었으며 다시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기에 선사들을 우대하는 비의 건립이 지연되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비문은 전면은 36행에 1행 81자, 음기는 29행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탄생하여 오관산으로 출가한 후 화엄을 배우다 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등 선사를 만나 수학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한 이력과 헌강왕 정강왕 등의 우대를 받고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였으나 사양한 등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흥령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킨다거나 명주 승정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사료가 들어 있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 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기호철 글)
2005-10-08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 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기호철 글)
200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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