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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와 현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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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715회 작성일 23-03-2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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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와 현대사회

 이기백 국사학자

1. 머리말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혹은 전통문화를 미화하고, 이를 무조건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무술신앙(巫術信仰)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든지, 혹은 풍수설(風水說)에 따라서 무덤을 쓰면 가문이 번영한다든지 하는 생각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래서 만일 전통문화에는 현대에 계승해야 할 것이 있음과 동시에 버려야 할 것도 있다고 하면, 이를 백안시하는 경향조차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 든 보수적인 사람들뿐 아니라 진보적이라고 자임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인 경우에 오히려 더 심하기조차 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한 풍조가 어떠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는 것인지를 필자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곧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만일 전적으로 전통에만 매여 있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는 발전할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코 민족을 위하고 사랑하는 길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전통 내지 전통문화에는 오늘에 계승해서 발전시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비판하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하나의 전통이나 전통문화에 있어서도,  그것에는 계승해야 할 측면과 버려야 할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전통문화의 재발견 작업인 것이며, 오늘에 사는 우리가 후손을 위해서 감당해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서는 족보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족보가 단지 지나간 과거의 유물인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적지 않은 힘을 가진 존재이고 보면,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족보가 현대에도 한국인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족보 출판 상황에서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즉 1920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간에 출판된 도서의 건수를 보면, 족보는 1920년에 63건, 1929년에 178건으로서, 매년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이여성·김세용,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제1집, 세광사, 1931, pp.133∼137). 이것은 『숫자조선연구』의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다(같은 책, p.136). 그같은 대세는 뒤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출판물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에 족보가 제1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수의 족보가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간행한 1998년판 『한국출판연감』 2, 목록편에 의하면, 1997년 중에 간행된 족보는 모두 76건에 이르고 있다(pp.567∼569). 그 대부분이 회상사(回想社)라는 족보 전문 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인데, 회상사에서는 족보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회상사는 1954년에 설립된 이래 1997년에 이르기까지 43년 동안에 1,200여 문중의 족보 500여 만권을 발간했다고 한다(「족보 출판 43년 외길-회상사 박홍구 사장」, 『동아일보』 1997. 2. 12). 그리고 족보도서관을 세운 박사장에 의하면, 1970년대 후반부터 '뿌리'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대전에 족보도서관 생긴다」, 『동아일보』 1988. 5. 28). 그런데 족보 중에는 종친회에서 옛것을 재판해 내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로는 『출판연감』에 나타난 숫자보다 훨씬 많은 족보가 출판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같이 족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오늘의 이 시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족보에 대한 관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검토해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의 하나라고 섕각한다.

2. 족보의 효용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인 『바른 생활 이야기』(2-2)의 제5장 제목은 「족보」이다. 우선 족보가 이렇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상수는 증조할아버지의 제삿날이라서 공부가 끝나자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는 할아버지·할머니를 위시한 친척 어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상수가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는 족보를 보이면서 조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이 글은 족보가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상 중에는 웃어른을 잘 모시고 친척들을 잘 보살펴 효부상을 받으신 분도 계셨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치신 분도 계셨습니다. "상수도 조상의 훌륭한 점을 알고 본받아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상수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집안의 조상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상수는 조상의 훌륭한 점을 본받는 어린이가 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아마 이 글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족보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족보가 가지는 효용성을 인정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족보를 다룬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족보는 그 본질이 조상의 업적을 적은 것이기보다는 혈연적인 계보를 적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위의 결론은 반드시 족보에서 얻어지는 최상의 효용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대로 의미가 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필자는 일찍이 신라시대 말기의 사병(私兵) 문제를 다루면서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여러 문헌을 두루 찾아본 일이 있다. 그런 중에 『연조귀감(연曹龜鑑)』에서 중요한 사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연조귀감』은 향리에 대한 역사책인데, 그 취지는 향리와 양반은 원래 같은 사회적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신분적으로 구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 족보를 이용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였다. 『흥양이씨보』에는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현(州縣)에 제패(制覇)하였다"라는 글이 있는데, 『연조귀감』에 이 대목이 인용되고 있다(『연조귀감』1, 이직명목해(吏職名目解) 호장(戶長) 조). 필자는 이것이 신라 말기에 지방의 세력가들이 군사력을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pp.266∼267). 이때는 아직 『흥양이씨보』 자체는 보지 못하였으나, 뒤에 그것이 고려대학교 도서관 만송문고(晩松文庫) 속에 『흥양이씨가첩』이란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권두 서문에 위의 문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족보의 기록을 어느 정도로 믿고 역사적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시각도 있었으나,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이 옳았다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경험이 또 한 번 있었다. 1979년의 일인데, 진주 소씨(晋州蘇氏) 서울 종친회의 한 분이 종친회보(宗親會報)를 가지고 연구실로 필자를 찾아왔었다. 그러면서 진주 소씨의 시조는 신라시대의 상대등(上大等)이던 알천(閼川)인데, 회보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알천은 왕족 김씨(金氏)이므로 소씨(蘇氏)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구실을 들어 거절하여 보냈었다. 그분은 필자가 쓴 『상대등고(上大等考)』를 알고 있었으며 거기서 알천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언급한 일이 있으므로 그 논문을 읽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 뒤에 필자는 신라 말기에 김해(金海) 지방에서 활약하던 김율희(金律熙)가 때로는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김(金)과 소(蘇)는 서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金은 음이 '김'·'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알천의 성이 소(蘇)인 것이 잘못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알천은 김춘추(金春秋)와의 왕위 계승을 에워싼 대립 속에서 패하였고, 마치 원성왕(元聖王)과의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김주원(金周元)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듯이, 알천도 진주(晋州)로 내려갈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진주 소씨의 족보에 나타난 알천에 관한 기록은 이 같은 숨겨진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진주 소씨의 족보는 믿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족보란 현실적인 생활면에서나, 또 역사적인 자료로서나, 모두 유용한 기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3. 민주사회의 걸림돌인 족보

그러나 한편 족보의 부정적인 면도 또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숫자조선연구』의 저자인 이여성(李如星)·김세용(金世鎔)은 출판에서 족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봉건적 성벌제도(姓閥制度)의 잔재인 족보출판이 조선 출판건수에 제1위를 점하였다는 것은 이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일까. 조신인의 가장 많이 요구하는 출판물이 이 썩어빠진 백골록(白骨錄)이라 하면, 참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족보 출판열의 대두는 성벌제도의 급격한 파멸에서 반동적으로 일어난 최후적 청산행위(실제적 의미에 있어서)이오, 동성동본(同姓同本)을 팔아먹고 살겠다는 '족보출판상인'들의 영리적 기업에서 자극된 것이므로 미구에 족보 출판열은 냉회(冷灰)와 갈이 식어지고 말 것이며, 또 유한성본(有限姓本) 무한족보(無限族譜)가 나올 까닭도 없으니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인의 봉건적 사상의 잔재가 아직도 이같이 농후하게 남아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의미로 보아 성본(姓本)에 대한 역사적 문헌 가치를 무시할 바 아니나, 이것이 출판 허가수의 제1위를 점하였다는 것은 한 반동적 기현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숫자조선연구』, pp.136∼137). 즉 그들은 이 같은 족보열이 봉건적 성벌제도의 잔재로서 반동적인 기현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만일 '봉건적'이란 말을 '신분제적'이란 뜻으로 이해한다면, 위의 비판은 조선시대에 양반의 신분을 보장해 주던 족보는 현재에는 반(反)시대적 성격의 것이란 뜻일텐데, 이는 정당한 비판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들의 비판은 극히 원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족보 전문 출판사인 회상사의 대표로서 족보도서관을 설립·운영하고 있는 박홍구(朴泓九)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며칠 전에는 50대 초반의 신사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찾아왔어요. 돈벌이에만 힘을 쏟아 수개의 기업체를 거느리는 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겁니다.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는 그는 맏딸을 시집보내려다, 신랑집에서 족보를 요구하자 당황해, 명문가의 족보에 자신의 일가를 끼워 넣어줄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물론 거절했지요(「대전에 족보도서관 생긴다」, 『동아일보』1988. 5. 28).] 이 증언에 의하면 딸의 결혼이 족보가 없기 때문에 곤란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반은 양반과만 결혼을 하던 양반사회의 풍속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족보는 현재에도 양반 자손들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숫자조선연구』의 저자가 족보 출판을 반시대적인 기현상이라고 비판한 것은 올바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양반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든 족보에 이름을 끼위 넣어서 양반 행세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조선시대 후기에서부터 있어 왔고, 이에 대해서는 다른 분이 언급하게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위에서 인용한 회상사 박홍구 대표의 말에도 나타나 있다. 위의 인용문 바로 뒤이어, 취재기자는 "박씨는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졸부들의 유혹도 많이 받는다고 귀띔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에서도 이러한 일이 많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인구의 신분별 분포상황에 대하여는 확실한 통계숫자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농업에 종사하는 상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노비의 비중도 상당히 높은 것이어서, 이에 대해서도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 전인구의 20∼30퍼센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제 인구의 대부분이 상민이나 노비의 자손인 셈이다. 그런데도 많은 가정에 족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족보가 모두 진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믿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를 들 수도 있다. 가령 『단성호적(丹城戶籍)』에서 사노(私奴)로 나타나 있는 흥룡(興龍)의 후손임이 분명한 양○호는 1996년에 양성지(粱誠之)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다(백승종, 「호적이 말하는 민중의 삶」, 『한국사 시민강좌』 22, 1998, pp.172). 그러니까 1996년 이전인 어느 시기에 남원 양씨(南原 粱氏)의 족보에 끼어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뒷산에 질이 좋은 숫돌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인근 마을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 경제적 부가 그 일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또 이런 예를 들 수도 있다. 해방 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분 중의 한 분은 그의 부친이 노비 신분이었다고 한다. 그분 자신은 인격이 고결해서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는 일화까지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자제분이 부친의 전기를 출판하였는데, 거기에는 양반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자제분이 같은 성씨를 가진 어느 가문의 족보에 넣도록 했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신분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낡은 시대의 유산일 뿐이다. 개인의 실력에 의하여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적합한 사회적 지위와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이상이다. 그런데 족보는 옛날의 신분적 질서를 유지·보전하고, 이에 의하여 인간을 차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이는 민주사회의 이상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사실과는 어긋나는 족보가 증가하고 보면,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은, 결국 남을 속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족보를 가지고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날이 곧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 유행하던 족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족보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것은 잘 보존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후대의 거짓 족보들도 역사 연구의 자료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양반사회가 무너져가는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선조의 업적을 본받아서 자기도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족보를 통해서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족보의 긍정적인 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점도 실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업적을 남겨야만 후손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리의 청소를 담당하는 미화원이건, 아파트의 경비를 담당하는 경비원이건 간에, 성실한 생활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식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를 말한다면, 평안도 군인의 아들인 고조부는 가난하여 동생을 유기회사(鍮器會社)의 사환으로 일하게 하였다. 사환으로서 하는 일은 손님의 시중을 들며 요강을 부시고 타구를 닦는 일이었다. 그 뒤 주인의 신용을 얻어서 외상으로 놋그릇을 얻어 이를 짊어지고 다니며 파는 장돌뱅이 부상(負商)이 되었다. 이렇게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 드디어는 외국과의 무역을 하는 거상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는 민족을 위한 구국운동에도 투신하였다. 이렇게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 되었지만, 본인 스스로 "나는 상놈"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어느 원로사학자는 우리나라의 진정한 근대인은 그분 한 사람뿐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비록 족보는 없지만 이러한 일들은 후손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심으로 간단한 조상의 계보를 만들어서, 그분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을 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것은 족보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4. 맺는말

요컨대 족보를 자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켜서 중요시하는 생각은 양반 후손들의 귀족적 심리의 산물이다. 보통 사람의 후손들, 특히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집안의 후손들은 족보를 원하지 않는다. 조상을 위하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사형집행인(死刑執行人)의 가족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파리의 사형집행인 후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홍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파리의 사형집행인의 가계(家系)로 널리 알려진 상송 가문의 무덤은 몽마르트르의 묘지에 있지만, 바바라 레비 여사(女史)에 의하면 직계 자손의 성묘가 확인된 것은 1920년이 최후였다. 현재(1972년) 파리의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는 29세대의 상송 가문은 그 사형집행인의 가계와는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971년 5월과 1972년 5월에 붉은 제라늄꽃 두 바구니가 무덤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아베 긴야<阿部謹也>, 『형리(刑吏)의 사회사』, 중공신서<中公新書>, 1978, pp.5∼6). 신분제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의 자손은 그 조상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조상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건만, 그 사랑하는 조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떳떳한 가문의 자손으로 행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족보에 끼어들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선조들의 신분적 귀천이나 직업적 차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등한 입장에서 정치활동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결혼의 자유 등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여러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역사가 지시하는 이상이다. 이런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족보는 걸림돌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걸림돌을 사회적인 유력 인사들이 제거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과대 포장하려고 하는 형세이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 걸림돌을 의식적으로 제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24집(1999년 pp.108∼117 일조각 발행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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